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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지킴이 안용복

하이에나처럼 강한 자에게는 비겁하게 돌아서지만 약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는 끊임없이 집적거리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 일본은 우리의 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끊임없이 우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땅 독도는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독도)을 신라영토로 복속시킨 이후 홍순칠를 비롯한 많은 선각자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져 왔다.

여기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대외에 증명했던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안용복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안용복이 일반 백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외국으로부터 서계(書契 외교문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울릉도 약수공원에 있는 안용복 기념비

그것은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에 산재해 있는 많은 역사서들이 이를 뒤 받침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울릉도.독도는 우리에게 있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하지만 일본은 안용복을 국경을 넘어 온 죄인이며, 처벌을 두려워 거짓말을 한 사기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산재해 있는 많은 안용복에 관한 기록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또 안용복의 활동을 조사하여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조차 조작되었다고 망동을 부리고 있다.

일본의 이 같은 작태는 만약 안용복의 존재가 부각되면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17세기 8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어로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땅이라는 주장 자체가 불법 어로 활동 및 불법 영토 침탈이라는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가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세계적인 보물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세계적인 보물까지도 부정하는 나라다. 내 발에 묻은 똥은 문제가 없고, 남의 몸에 묻은 겨자는 냄새가 난다고 난동을 부리는 곳이 일본이다.

부산 수영공원 내「안용복장군 충혼탑」과 울릉도 남면 도동에 있는 우뚝 서 있는 「안용복장군 충혼비」의 주인공 안용복(安龍福). 그는 출생에 관한 내용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안용복 사건이 발생한 후 약 130년이 지난 1828년 오카시마 마사요시(岡島正義)가 저술한 죽도고[竹島考]를 살펴보면 안용복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죽도고에는 안용복이 제1차 도일 당시 지녔던 호패(號牌)에 적혀있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호패는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다. “東來 私卜 年33 長4尺1寸 面鐵多暫生無 主京居吳忠秋 慶午 釜山佐自川1里 第14 3戶” 이를 해석 하면 “부산 좌천동에 거주하는 노비 용복은 36세 키가 140센티 정도로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수”이다. 여기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안용복이 일본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왜관을 출입하던 상인이다. 또는 서울에 거주하는 상인 오충수의 대리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죽도고에는 일본에서 안용복이 자신을 소개한 내용에는 안핑샤(裨將) 즉 군대의 총지휘관을 보좌하는 무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국내기록인 성호사설(星湖僿設)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安龍福隸能櫓’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경상좌수영 소속 수군인 능로군(能櫓軍)이라는 것이다.

어째든 안용복은 벼슬이 없는 노비이거나 평범한 조선 백성에 지나지 않는 것을 틀림이 없다. 어떻게 일개 평범한 백성이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장쾌한 일을 할 수가 있었는가? 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일관계에 있어 우리에게는 제2의 안용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왜구들의 노략질
고대 최고의 하이테크 제품은 도자기이다. 지구상에는 지금까지도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 나라들이 많지만 한반도에서는 9세기에 완성시켰다. 이 이후 한반도에서는 개밥그릇까지도 도자기를 사용하는 등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17세기 초까지도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나라였다. 이러한 일본은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첨단 문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들의 노략질은 13~15세기 극에 달하고 있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 잔뼈가 굳었을 정도다.

태종7년(1407년) 3월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는 사신 다이라도오젠(平道全)을 조선조정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토산물을 헌납하고 왜구들이 납치해간 포로들을 송환함과 동시에 울릉도에 대마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대마도주 자신이 통솔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만약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생기면 저들도 반드시 말썽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대마도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태종17년에는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므로 사람들이 쉽게 찾아가지 않는 땅이므로 군역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또한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 되면 반드시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것이고 이로 인해 왜구들이 강원도에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이라며 공도(空島-지금의 안식제도, 주민철거) 정책, 일명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하였다. 쓰시마기지(對馬島記事)에는 이를 ‘이름을 남기고 땅을 비운다(留名棄地之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정책은 당시 왜구들의 약탈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 일본에서는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 정책을 섬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 정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멀쩡한 자기나라 영토를 포기하는 나라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편 조선왕조는 공도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를 파견하여 중죄를 짓고 도망 온 자들이 없는지 등 섬의 실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토록 하였다. 당시 울릉도와 독도는 삼척부 소속이었다. 그 이후 일본이 한반도를 침탈한 임진왜란 발발 등으로 통치력이 약화되어 울릉도•독도를 돌볼 여력이 없게 되자 3~5년을 주기로 점검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울릉도와 독도 일대는 불법 어로는 물론 산림을 무단 벌채하여 판매하는 등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614 (광해군 6년) 6월 대마도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요청으로 죽도(울릉도의 일본표기)를 탐견(探見)하려고 하는데 큰 바람을 만날까 두려우니 길 안내를 요청한다"라는 서계(書契 외교문서)를 동래부에 보내왔다. 이에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거절하는 회유문을 주어 돌려보냈다.


조선조정은 그 해 9월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가 분명하므로 앞으로 이런 일본측의 같은 시도가 있으면 이러한 모든 내용과 함께 대마도주에게 강경한 내용의 서계를 주어 막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울릉도에 일본인의 왕래를 금지하도록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하였다(광해군6년9월).

그런데 이듬해 1615년 또 다시 일본배 2척이 와서 ‘죽도의 형지를 탐험하러 간다’고 하였다. 

     ▲18세기 일본이 작성한 총회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이 황색으로 표기하고 ‘조선의 것’이라 부기함

이에 동래부사는 ’지금은 공도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외국의 왕래를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답서를 주어 돌려 보냈다.

여기에서 잠시 살펴 보면 대마도주가 울릉도와 독도에 갈 수 있도록 요청한 것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를 넘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풍부한 수산자원과 산림자원 때문이었다. 일본서적 호키민당기(伯嗜民談記)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에 자원이 얼마나 풍부했는지 짐작케 한다. “저녁에 대나무를 바다에 던져 놓으면 아침에 전복이 나뭇잎과 가지처럼 붙어 있었다(岸 に生茂る竹を撓めて. 海中へ沈め置さ.朝海に是を浮ぷるに鮑蛤竹の 枝葉に附).” 울릉도와 독도 일대의 풍부한 자원은 척박한 땅인 대마도주로서는 군침이 도는 무릉도원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618년 조선정부의 이러한 강경한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본토(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서는 오타니 집안과 무라카와 집안에게 죽도 도해 면허를 내주었다고 한다(돗도리현 요나코 시립역사관에 사본 보관).

일본의「문예춘추:소화 40년 11월 특별호」를 살펴보면 일본 본토인으로서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竹島)를 발견한 자는 돗도리현(島取縣) 요나코(米子) 출신의 오타니 신키치(大屋甚吉)였다. 그는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서 廻船業(여객선업)을 하고 있던 자이다. 그는 1617년 일본으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배가 표류하게 되어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죽도에는 해양과 육지의 산물이 풍부하다. 그 중에서도 포어(鮑漁;전복)는 특산물로써 다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고라며 뛸 듯이 기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타니는 일본으로 돌아오자 마자 막부에 항해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물론 이는 울릉도.독도 일원의 풍부한 자원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그러나 막부는 국내의 관할권이 아니라며 허가하지 않았다. 1년 후 1618년 오타니는 막부와 깊은 연을 닫고 있던 무라카와 이치베이(村川市兵衛) 가문과 공동사업 형태로 새로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요청서에는 울릉도와 죽도가 무인도라 기록했다. 이로써 1618년 막부로부터 '죽도 도해면허(渡海免許) 봉서(奉書)'을 얻게 된다.(도해면허란 국외로 나갈 때 받는 문서로 오늘날 여권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봉서는 정식 허가서가 아니고 편지 형태를 말한다. 봉서 형태로 발급했다는 것은 조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취한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쯔코이찌랑(通航一覽)이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1620년 야자에몽이라는 자가 울릉도에서 나무를 베어 불법으로 팔다가 도쿄에서 처형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1620년도에도 막부가 울릉도 독도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막부의 도해 봉서는 1625년 이후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 시마네(島根)대학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사진) 교수는 도해허가는 매년 발급하여 갱신하는 것이 원칙이나 막부가 오타니. 무라까와 가문에게 발급한 것은 1회로 끝났고, 봉서 형태를 띤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상황은 두 가문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고야대학 이케우치 사토시교수는 도해 면허는 일반인이 거기에 갈 수 있는 면허가 아니라 오타니.무라까와 만이 갈 수 있는 면허다. 따라서 울릉도.독도를 일본령이 아니라고 인정한 것이라고 한다. 또 막부가 봉서 형태를 띠면서 도해 면허를 준 것은 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고 했다.


안용복 막부(幕府)와 1차 담판
두 가문은 이 지역에 대한 독점권 행사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현재 요나코시 나니와마치(灘町) 1가 1∼30번지 일대는 당시 오타니의 집이 있던 곳이다. 오타니의 저택은 본가와 일꾼들의 숙소로 이용된 별채를 포함해 50여 칸에 800평에 달하는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돗도리현(島取縣)에서도 이들의 사업을 지원했으며 이 두 가문은 막부에 막대한 뇌물을 헌상했다. 이에 막부는 이들 가문에 막부의 문장이 새겨진 기모노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후쿠하라 노리야키 산음(山陰)박물관장은 시골 어민이 막부까지 가서 헌상을 하고 막부로부터 기모노까지 하사 받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고 이는 ‘일대사건’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뇌물이 건너 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문이 독점적인 어로를 시작한지 약 70여 년이 지난 1692년 3월 울릉도에서 조선 어부들과 마주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자 일본인 선원 중에 화가 궁삭설부(弓削雪夫)가 그림을 그려가면서까지 조선 어민들을 퇴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어부들은 조선 땅임을 강조하고 퇴거를 거부했다. 그 교섭이 10일간이나 끄는 동안 조선인 어부들이 70~80명으로 늘어나자 일본어부들은 요나꼬로 철수하였다.

일본으로 돌아 간 이들 가문은 돗도리현을 통해 막부에 이 사건을 해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막부는 "잘못은 저쪽(조선어부)에 있다. 60여 년의 세월이 무엇보다도 근거가 된다. 곧 저쪽이 잘못을 깨닫고 철수 할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구끼 등이 제작한
조선국지리도(50×36cm). 일본에서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식 명칭으로 표기한
지도(1872년 재모사)

은인 자중하여 종전대로 고기잡이에 힘씀이 마땅하다"라는 훈령을 돗도리현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막부의 무기력한 답변에 두 집안은 낙담이 컸다고 한다.

다음해 1693년 3월 양국의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또다시 마주쳤다. 기록에는 울릉도 오오테구(大天狗)라는 포구로 기록되어 있다. 두 나라의 어부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했지만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조선인 어부 두 명이 대표성을 띠고 일본에 항의하러 갔다고 한다. 이 두 명이 바로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때 안용복 일행은 40여 명이었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1693년 4월 20일 오키도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오키도주에게 일본어부들의 조선영토 침범을 강하게 항의하였다. 죽도고에서는 이때 오키도주가 술과 생선 등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93년 4월 27일 안용복 일행은 돗도리현 오타니 가문에 도착하였다. 돗도리번주는 안용복 일행을 지금의 영빈관인 마찌가이소(町會所)로 옮겼다. 이것은 귀빈 대접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마네(島根)대학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교수도 “안용복 일행에게 주야로 3되의 술이 제공되었다는 내용이 일본측 문헌인 「어로일기」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돗도리현에 도착한 안용복은 번주에게 울릉도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강하게 항의하였다. 와다 시키부가 작성한 돗도리번 공식일지 히카에초(控帳) 1693년 4월 30일자 기록에는 안용복의 진술 내용과 그가 소지했던 후서3통을 막부로 보냈다고 한다. 번주가 막부에 보고할 정도였다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안용복이 최초로 울릉도 독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표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개 평범한 조선백성 안용복은 막부로부터 울릉도.독도가 조선령이라는 외교문서를 받아내는 강대함을 보였다(숙종실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울릉비일본계(非日本界)”라는 서계를 돗도리번주를 통해 막부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5월말 막부는 '안용복 일행을 잘 설득시킨 뒤 나가사키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 루트가 쓰시마(對馬島)번으로 단일화되어 있었고, 나가사키가 쓰시마번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측 기록인 ‘인부넴표(因府年表)’ 6월7일자 기록에는 나가사키에 있는 쓰시마번으로 안용복 일행을 호송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호송사 이외에 의사, 요리사. 잡부, 가마꾼. 병졸 등 약 100여명이 동행했다’. 이 정도의 행렬이라면 장군행렬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막부의 조치는 안용복의 사건으로 인한 외교적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안용복 일행이 국경을 넘어온 범법자였다면 이러한 대우는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히카에쵸(控帳) 1693년 6월 기록에는 막부가 돗도리번에게 요나코의 두 상인이 어떻게 울릉도에 도해했는지 묻고 회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막부가 공식문서가 아닌 봉서 그것도 1회 만 발급했던 사실을 70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를 수 있는 상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막부가 조선령으로 알고 있는데 두 가문이 불법 침범한 사실을 알기 위한 조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마도주의 간교한 술책
1693년 6월 30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갑자기 외국인을 심문하는 봉행소(奉行所)로 옮겨졌다. 쓰시마번주는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쓰시마번주는 이러한 위치를 악용하여 막부의 결정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을릉도와 독도를 넘보고 있었던 자이다. 이런 쓰시마번주는 안용복 일행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신분상 허점을 간파하고 외교문서 서계를 안용복 일행으로부터 탈취한다(숙종실록). 그리고 안용복 일행을 국경을 넘어 온 죄인 취급을 하면서 표류민 대우를 하였다.

또한 쓰시마번주는 그 해 겨울 안용복 일행을 동래부로 호송하는 길에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시켜 조선측에 서찰을 보내 "죽도에 조선 어민의 출어를 엄격히 금지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안용복 일행의 엄중 문책을 요구하였다. 실제 안용복은 동래 관헌에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1694년 8월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의 경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땅이다. 다시는 일본인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강경한 거절 회답문을 보냈다. 이 회답문을 받은 쓰시마 관리는 "우리나라의 경지 울릉도" 라는 말을 극히 싫어해서 "서계에 단지 죽도(竹島)라고만 하면 참으로 좋을 것을 반드시 울릉도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며 "울릉도"의 삭제와 개서를 요청하였다. 조선조정에서 회답이 없자 이번에는 국경을 침범했다는 뜻인 ‘침섭(侵涉)’을 고쳐달라고 재차 요구하였다. 이것마저 거절당하자 다시 애초에 요구했던 ‘을릉도’라는 말을 고쳐달라고 하는 등 1년 넘게 끈질기게 생떼를 썼다. 이러한 사실은 다케시마기지(竹嶋記事)에 기록되어 있다.

이 즈음 조선조정은 안용복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안용복이 처음 일본에 이르렀을 때 일본은 대우를 매우 잘 했는데 나가사키와 쓰시마에 이르러 안용복 일행을 책망했으며 서계를 탈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막부의 견해가 아니라 쓰시마번주가 공을 세우기 위한 계책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사실을 왜관에 있는 일본사절에게 알리고 "우리나라가 장차 일본(막부)에 서계를 보내 안용복을 책망한 사실을 알리면 여러 섬들이 무사하겠는가?"라고 추궁했다. 이에 일본사절들은 ‘倭差相顧失色’ 즉 왜 사신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아연실색했다는 것이다. 쓰시마번주는 70여 년간 일본이 불법어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항의하지 않자 조선이 이 섬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아 진다(숙종실록20년 8월 13일)

이에 대마도 사신은 조선조정으로부터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1695년 10월 되돌아 갔다. 1년이 넘게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이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제2의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 사태를 계기로 조선은 대일 우위 외교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안용복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안용복의 막부와 2차 담판

이즈음 동래부에 감금되어 있던 안용복은 석방되었다. 안용복은 쓰시마번주가 울릉도와 독도를 탈취하려는 야욕은 막부에 대한 신임을 얻기 위한 독단적인 계책임을 간파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는 1696년 봄 80여 명에 3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에서 일본어부와 또 다시 마주친 안용복은 그들을 꾸짖고 내쫓았다. 그러자 일본어부들이 ‘倭言吾等本住松島’ 즉 “독도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 고기잡이하러 왔다”라며

▲울릉도 약수공원 내 독도박물관 전경


독도로 도주하자 독도까지 쫓아가 독도 역시 우리땅(松島卽子山島)이라며 이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이어 안용복 일행은 일본 본토로 향했다. 1696년 5월 20일 안용복은 10명의 일행과 함께 일본 오키도(隱岐島)에 도착하였다. 안용복은 오키도주에게 “3년 전 막부가 울릉도.독도가 조선땅이라고 분명히 했는데 어찌하여 또 다시 침략하느냐”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상소문을 막부로 올렸다.

이러한 사실은 “원록9년병자년조선착안1권지각서(元祿九年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라는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이 문서는 2차 도일 때 안용복이 진술한 것을 일본관리가 받아 적은 조사서이다. 이 문서는 그 동안 무라카와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무라카와의 후손(무라카와 48대 당주)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시마네현의 조례 제정이 잇따르자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2003년 5월 이를 공개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분명히 밝힌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주장을 무력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문서로 확인되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당시 안용복이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1.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의 크기(15x4m), 11명의 이름.관직, 노의 개수, 배에 사용하는 키의 크기 등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2. 안용복은 제1차 도일 때와 또 다른 요패 “통정대부 안용복 연갑오생 임동래(通政大夫 年 甲午生 壬東萊)”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정3품 문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3. 또 안용복은 뛰어난 문장가 이인성까지 대동하여 필담을 하였고, 이인성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작성하여 막부에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4. 그리고 안용복은 놀랍게도 조선팔도지도와 가케츠케(書付)라는 서책1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관리는 서책의 내용을 1부 베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책(書付)이란 에도막부 시대 장군이나 노중(老中;영의정에 해당하는 직책)의 명령을 전하는 일종의 공문서를 말한다. 이는 안용복이 1차 도일 때 쓰시마번주에게 탈취당한 서계 외 돗도번주 또는 막부의 싸인이 들어있는 서책으로 보아 진다.

5. 지금은 지도를 아무나 지니고 다닐 수 있지만 당시 조선팔도지도는 아무나 지닐 수 없는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다. 안용복이 조선팔도지도를 지녔다는 것을 무모하리만치 과감한 행동이었다. 조선팔도지도에는 “江原道 此道中竹嶋松嶋有之” 즉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에 속한다”라고 특별히 주석한 것이었다. 이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안용복의 제2차 도일 목적이 분명해진다.

6. 여기에 안용복은 일본의 주장을 조목조목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일본이 주장하는 竹島는 강원도 동래부에 소속된 울릉도이고, 울릉도 오른쪽에 있는 松島는 울릉도의 새끼 즉 아들섬(右島內子山島)으로써 역시 조선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실질적인 거리는 차이가 있지만 조선에서 죽도까지 30리, 죽도에서 송도까지 50리라고 거리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죽도고 기록을 살펴보면 이때 안용복이 타고 온 배에는 “기선미견성도 우귀고향사농시(起船尾見盛稻 又歸古鄕思農時)”라는 깃발 위에 '朝鬱 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라는 대형깃발을 달고 있었고, 안용복 스스로 당시에 없던 ‘울릉.우산 양도의 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관직을 사용했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볼 때 2차 도일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용복 단독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마네대학 교수는 2차 도일의 목적은 확실했으며 이는 안용복이 직접 소송을 하기 위하여 많은 준비를 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기록을 종합하여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이 주장하는 80년간 실질적으로 이 지역에서 어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끊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오키도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돗도리번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직접 상소를 하기 위하여 본토로 들어갔다. 돗도리번주는 관리를 파견하여 안용복 일행을 사신으로 맞이했다. 당시 안용복은 ‘푸른 철릭(天翼)을 입고 검은 포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타고’ 번청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숙종실록). 6월 20일 안용복은 돗도리번주와 마주 앉아 "3년전 양도의 일로 서계를 받았음이 명백한데도 대마도주는 서계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막부에 상소하여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임부넴표 6월 7일자에는 "죽도에 도해한 조선의 배 32척을 대표하는 사선 1척이 돗도리번에 직소를 하기 위하여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쓰시마번과 관계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타케시마기지(竹島記事)에는 에도막부에 있던 쓰시마 사람이 돗도리번에서 올라 온 보고를 듣고 매우 놀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쓰시마 종가 문서 테류인코 지쯔로쿠(天龍院實錄)에는 쓰시마번주 아버지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므로 청컨데 이 상소를 막부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달라(不容轉啓)"고 돗도리번주에게 간청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돗도리번의 공식기록 히카에초에는 6.21이후 8월까지 안용복과 관련된 기사들이 사라지고 없다. 이는 돗도리번과 쓰시마번의 비밀스런 거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돗도리번주는 안용복에게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함부로 침범하면 도주가 모두 국서로 만들어 역관을 정하여 들여 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또 돗도리번주는 안용복에게 귀향 길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에 안용복은 8월 강원도 양양으로 자유롭게 돌아왔다. 이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만약 안용복의 주장이 부당했다면 1차 도일 때와 같이 외교적인 루트인 쓰시마를 통해야 했다.

이와 같이 돗도리번과 쓰시마번의 긴박한 상황 전개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즉 돗도리한시(島取藩史) 1695년 12월 24일자 기록에는 막부가 두 가문이 울릉도 도해 경위를 묻는 7가지 질문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막부의 외교문서를 정리해 놓은 쯔코이찌랑(通航一覽)을 살펴보면 안용복이 2차 도일하기 이전 1696년 1월 28일 막부는 “울릉도는 애초에 조선으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니니 지금 돌려 준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일본) 사람이 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할 따름이다”라고 하면서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이미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조선에 알리라고 지시를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쓰시마번주는 이를 조선에 알리지 않았다. 또 두 가문에 이 금지 봉서가 전달된 것은 1696년 8월 1일이었다고 하키에초에는 기록하고 있다.

결국 안용복이 2차 도일하기 이전 막부는 이미 울릉도.독도가 조선땅이므로 이 두 섬에 일본인들의 도해 금지령을 내렸지만 쓰시마번주가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쓰시마번주는 당시 조선과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고,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루트의 최정점에 있었던 점을 악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쓰시마번주는 항명에 대한 막부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돗도리번주와 밀거래를 했던 것이다.

안용복 일행이 2차 도일 사태가 발생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쓰시마번주는 1697년 1월 막부의 결정을 조선에 알렸다. 안용복의 활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의 상소는 그 후 막부에게 보고되어 이전에 국경을 침범하여 울릉도에 들어갔던 일본인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고 한다(신용하교수).

한편 오늘날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도해금지 봉서에는 ‘울릉도’만 표시되어 있고 ‘독도’는 빠져있기 때문에 독도를 막부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안용복이 주장했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리고 나이토교수와 다카시 교수도 이것은 독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2차례에 걸친 안용복의 활동은 장쾌한 것이었다. 안용복의 활동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등으로 어수선했던 조선정부는 일본의 영토 침탈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고, 대일외교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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