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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신사의 탄생

신사(神社)의 유래
일본에는 거의 모든 마을마다 신사가 있다. 신사는 그 마을과 깊은 인연(因緣)이 있다. 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신위(神位)로 정중히 모시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곳이다. 때문에 신사가 있는 곳은 마을에서 가장 정숙하며 가장 깨끗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도 항상 울창하게 정성껏 잘 가꾸어져 있어 경관(景觀)이 수려(秀麗)하고 엄숙하기 마련이다. 빨간치마에 흰저고리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사무소 여직원들과 흰 제복(祭服)에 검은 제모(祭帽)를 쓴 제관(祭官)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참배객들을 맞아 참배의식을 갖는데 관광객들의 발길도 무척 잦다.

원래 신사의 유래는 ‘역사조작’에서 언급했듯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반도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이들이 숭앙하는 인물 중 고인(故人)이 된 분의 신위를 모시고 길이 길이 그 덕을 기리기 위한 장소였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열도는 항상 한반도로부터 문물을 도입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반도인들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의미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 시골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대가 오래된 신사입구에는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것은 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향수씨의 저서 <일본은 한국이더라>에 잘 나타나 있듯이 북규슈 지방에 뿌리내린 단군신앙이나 남규슈 구시키노(串木野)시에 있는 환단(桓檀)신사는 환웅과 단군을 모시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니가타현(新潟縣) 사도(佐渡)섬에 있는 시라기(白木)신사나 가고시마현 다루미즈시(垂水市) 거세(居世)마을에 있는 거세신사, 또 시마네현(島根縣) 오오다시(大田市) 오오우라(大浦)항구에 있는 가라카미시라기(韓神新羅)신사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세기 이전까지 일본 전역에는 박혁거세왕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가 무려 2,700여 곳이나 있었지만 메이지 이후 700여 곳이나 합사되어 지금은 2천여 곳이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외 관동지방의 사이타마현(埼玉)에 고구려의 약광왕(若光王)을 모시고 있는 고려신사, 킨키(近畿)지방의 백제왕과 그들의 일족을 기리는 백제왕신사, 가야에서 건너간 김수로왕의 7왕자의 화신인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를 모시는 가고시마현 센다이시(川內市) 에노산능(可愛山陵) 정상에 위치한 니이다(新田)신사, 아이라군(郡) 기리시마정(霧島町)에 있는 기리시마신궁(霧島神宮), 니니기노미코토의 증손자이자 일본 초대 일왕이라고 조작한 진무(神武)를 모시고 있는 나라현 카시하라신궁(檀原神宮)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사들이 한반도와 관련이 있거나 한반도와 관련된 인물을 신위로 모시고 있다. 하지만 2천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애초에 건립된 신사의 의미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거나 조작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음(音)만 같고 그 뜻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개명 당하고 있는 신사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황국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이나 그 조작의 주역들도 한반도 후예들이지만 과거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역사와 문화는 이제 단절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사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복잡하게 더해갔다. 모든 자연현상이나 인간의 활동에도 제각기 이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일본인들은 믿고 있다. 이리하여 하늘의 신. 불의 신. 물의 신. 땅의 신. 바다의 신. 농사의 신. 숲의 신. 부엌 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 종류의 신이 탄생하게 되었다. 야오요로즈노 가미(八百万 神)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일본열도는 잡신들이 득실거리는 섬이다. 이들을 제사 지내는 곳이 바로 신사이며, 이를 믿는 종교가 신도(神道)로써 토착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의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가지고 있지만 결혼이나 출산 같은 인생의 중대사를 맞으면 복을 구하고 화를 쫓기 위해서 맨 먼저 신사를 찾는다. 이렇게 일본인들 생활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신사는 일본 전국에 약 8만여 개가 있다고 한다.

일본은 득실거리는 잡신들 중에서 일본왕을 유일하게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고 있다. 이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호전성을 숨기고 국민들을 다 잡기 위하여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조작시켰다. 그리고 일왕을 숭배하는 국가신도를 만들었다. 1889년 이들이 만든 메이지 헌법에는 ‘신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평화철학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유교,기독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칙령 12호를 반포하여 국가신도를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교육의 기초로 정했다.

국가신도는 조작된 일본역사서 ‘기기’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조상신이라고 조작한 가공인물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를 신봉하고, 그 직계 자손이라고 조작된 일왕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다. 국가신도는 일왕이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즉 기기에 일본이라는 뜻은 ‘세계의 전체’라는 주석에 충실한 해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출발한 국가신도는 평화 철학이 완벽하게 빠져있는 침략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일본왕의 명령으로 자행된 각종 침략전쟁은 성전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고이즈미를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 망언을 일삼고, 일왕의 명령으로 벌어졌던 아시아 침략전쟁과 이 기간 중에 벌어졌던 참혹한 일들을 일본이 오늘날까지 반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총칼을 앞세운 악랄하고 불법적인 일한병합 당시 일제는 한반도에도 신사를 건립하고 한반도인들에게 까지 강제적으로 국가신도를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당시 한반도에는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신사가 1,062여 곳이 있었다. 일제는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웠고, 각 가정에는 일본가정과 같이 가미다나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강제 동원된 인원은 신궁 참배자만도 1942년에 약 26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前수상은 재임시절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고 일본인들의 속마음을 밝혀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이러한 모리의 발언은 ‘일본은 국민이 일본의 중심이 아니라, 일왕이 일본의 중심이다’는 뜻으로 일본이 '민주국가'라는 전제를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라는 자가 스스로 부정하였었다. 또한 이 발언은 주권재민과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모리의 발언 이면에는 그가 아시아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인 출신으로서 당시 일왕을 사람이면서 신이라는 의미의 현신인(現人神)으로 여겼던 낭만적 민족주의로 포장된 전전(戰前) 일왕 숭배사상에 대한 짙은 향수가 배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리의 발언은 군사대국화 된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집단살인의 전주곡을 환생 시키는 망발이다.

모리의 발언 속에는 일왕이 패전과 함께 인간선언을 했지만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그를 여전히 상징적인 존재 이상으로 숭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계기만 주어지면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되살리겠다는 보수우익들의 평균적인 사고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이러한 국가신도에 반대하는 국민도 간혹 있다. 1994년 ‘만연원년의 풋볼(万延元年のフットボ-ル)’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나는 일왕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일왕이 주는 상을 거부한 적이 있다. 그의 발언은 일왕을 신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에게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발언으로 일본국내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바가 있다.


야스쿠니 신사 탄생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오피스 거리로 유명한 지요다구(千代田區) 구단(九段). 일본왕궁 북쪽 9만 9천㎡(약3만평)의 광대한 부지에 본전 외 20개의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자리잡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幕府) 말기 미국의 흑선(페리제독의 함대)이 1853년 우라가(浦賀), 1854년 시모다(下田)에 나타나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힘의 열세를 느낀 막부는 개항을 결정한다. 이에 막부를 서양오랑캐에 굴복한 나약한 정부라 질타하며 양이(壤異)를 주장하는 수구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降盛). 키도 타카요시(本戶孝允).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등 소위 메이지유신(쿠데타) 3傑이라 불리는 이들은 세를 규합하여 막부와 치열한 정권 찬탈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뒤에 개항을 인정하고 개화의 길로 걸었지만 부국강병을 외치며 근왕도막(勤王到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1868년 이들은 무진(戊辰)전쟁에서 도쿠가와 일파를 물리치고 메이지일왕을 옹립함으로써 메이지 쿠데타 일명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다. 이로써 30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평화스러운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에 메이지 일왕은 1869년 무진전쟁에서 왕군을 위해 싸우다 죽은 혼령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사를 건립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이 신사의 이름을 ‘죽은 영혼을 모신다’는 의미의 '도쿄쇼콘샤(東京招魂社)'로 명명했다.

그러나 메이지 쿠데타는 하급 무사들의 난이었으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내전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이에 메이지 일왕정부는 정국 안정이 최우선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염원을 반영시키기 위하여 쇼콘샤는 세이난(西南)전쟁 2년 뒤인 1879년 ‘나라를 평안하게 함’이란 뜻인 현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로 개칭하였다. 그 이후 이 신사는 일본 전역에 세워진 신사 가운데 왕실이 직접 납폐하는 으뜸신사가 되었다

처음 이 신사에 모셔진 대표적 인물들로써는 메이지의 지도자로 많은 일본인이 좋아한다는 사카모토 료마(板本馬)를 비롯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 등을 비롯한 쿠데타 쪽의 장졸들이었다. 쿠데타에 앞장섰지만 정한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비롯한 일왕의 군대에 반기를 들었던 장졸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전쟁의 화신으로 변한 야스쿠니신사
메이지 쿠데타에 성공한 3류 사무라이들은 계속되는 정국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와 똑같은 수습책을 내놓는다. 즉 정한론(征韓論)을 부르짖어 흐트러져 있던 민심을 국외로 돌리게 한다. 여기에는 1만 엔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근대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어지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영향이 매우 컸다. 후쿠자와는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勸奬)' 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수천 년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를 ‘터럭 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라고 비하했던 자이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이러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국가들과 진퇴를 같이하자라고 설파한 소위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이들에게 있어 상승작용을 했다.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은 군국주의를 표방하고 정한론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한반도 우위 이론을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본격적인 역사조작의 판도라 상자를 열기 시작하였으며, 피의 화신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역사조작’에서 밝혔듯이 일왕을 외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 하는 만세일계로 포장하기 시작했고, 한반도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깡그리 부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제는1876년 무력시위를 통해 한반도 개항을 강제적으로 관철시켰다. 1853년 일본이 미국에 개항당했던 방법과 똑 같이 사용했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얻은 막대한 전리품에 재미를 느낀다. 1895년에는 한반도를 불법적인 병합을 위하여 최대의 장애 인물로 판단된 명성황후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시해했다.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더 큰 거짓을 저질러야 하고 악랄함을 포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악랄함을 발휘해야 했다던가? 3류 사무라이들은 여기에 거치지 않았다. 1879년 국민들에게 살인의 영혼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300년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외면당했던 임진왜란을 일으킨 살인의 악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전쟁의 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를 중건하기 시작한다. 이곳에는 ‘코무덤’에서 밝혔듯이 도요토미가 임진왜란 당시 전과를 과시하기 위하여 전사한 조선 군인 및 살아있는 남녀노소의 머리.귀 그리고 코를 베어가 만들어 놓은 세계역사상 가장 잔인한 유산인 코무덤(鼻塚)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들은 1898년 3월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 선봉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10대 손 구로다 나가나리(黑田長成)와 군국주의자들은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에 모여 진혼제를 가졌다.

이것은 300여 년 전 정한론을 실천한 살인의 화신 히데요시의 전쟁과 살인의 혼을 일본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군국주의에 충성을 강요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제 병합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에는 대규모의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다.

한편 수많은 전쟁터에서 젊은 목숨을 희생 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본 일본국민들은 사망자에 대한 보상이 미미하자 점차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순과 갈등을 숨기기 위하여 학살을 업으로 삼는 군국주의를 선택했던 메이지 정권이 아니었던가. 피의 단맛을 본 메이지 정권의 3류 사무라이들은 더 많은 피를 부르기 위하여 또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즉 이들은 나이.직위.종교.생전의 잘잘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왕의 이름으로 싸우다 죽은 자들은 모두 이 곳에 군신으로 승격시키는 특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위령제는 국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야스쿠니는 다른 신사와는 달리 지금도 제신이 무제한으로 늘어가고 있다. 방대한 제신 전부가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특수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리하여 야스쿠니는 일본신사중의 신사.신사들의 제1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야스쿠니는 국가기관으로, 신관(神官)은 공무원의 신분을 부여하게 되며,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영령(英靈)의 집으로 변질되었다. 아시아 침략전쟁 기간 중 일반신사는 내무성 소관이었으나 야스쿠니신사는 육.해군성의 특별보호 아래 운영되면서  ‘전투적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국영신사였다. 전쟁혼을 주입시키는 장소로 사용하여 국민들은 전쟁터로 내 모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또 일왕 숭배와 군국 이념을 전파시키는 제국주의의 정신적 총본산이자, 특별한 종교 시설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또 3류 사무라이들은 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위한 개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선전하기 위하여 '야스쿠니신사'와 ‘야마토타마시(大和魂)’를 연계했다. '야마토타마시(大和魂)'는 '역사조작 일본서기 조작'에서 언급했듯이 고대일본 건국과 관련된 뜻도 있지만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하고, 일왕과 국가를 위하여 조건 없이 목숨을 바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시아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들에게 일왕이 내린 하사품이라 하여 정종 한 잔과 ‘大和魂’이 새긴 머리띠를 하사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도록 강요한 군국주의 케치프레이즈가 바로 그것이다. 아시아침략전쟁 패망 당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전함(전장 263m,배수량 7만2809t)도 야마토(大和) 다. 이렇게 두 단어는 ‘일본정신의 바탕’이라고 강조하여 일제가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후 지금까지 아니 영원히 일본인들을  올가 메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시아 침략전쟁 패망 당시 A급 전범이었고, 1941년 야스쿠니신사를 관리하던 육군대장 스즈키 사다이치는 '야스쿠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야스쿠니신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제사를 통해 인령을 초빙한 후에는 인령이 아니라 신령이 되며... 유가족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된다...인령과 신령을 구분치 못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 

당시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출정의식을 하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고 각오를 다졌다. 전쟁터에서 일본군이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많은 시민이 야스쿠니신사에 모여 승전에 감사하는 의식을 치러는 장소로 사용했다. 1941년 12월 일제가 아시아 전체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1942년 2월 야스쿠니신사에서 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야스쿠니를 전쟁동원 체제의 장소로 활용했다. 인간의 광기가 경악을 넘어 얼마나 더 잔인할 수 있는가를 증명했던 가미카제특공대들은 출전 의식을 가질 때 다음과 같은  ‘벚꽃 동기생’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네 녀석과 나는 벚꽃 동기생/ 같은 항공대 정원에서 피어났다/그대와 나, 벚꽃 동기생들아/ 이별을 겹쳐가며 사라질지라도/ 꽃의 서울, 야스쿠니 신사여/ 봄이 오면 거기서 꽃피어 만나리”

당시 일본 국민들은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는 애국심(?)의 세뇌 속에서 각 개인의 신앙과 관계없이 참배가 강요되었다. 또한 ‘신사 비종교론’과 더불어 신사 참배는 ‘국민의 도덕, 의무’란 점이 강요되어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언동과 사상에는 치안유지법과 불경죄가 적용되었다. 그 결과 일본 국내에서는 약 10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한반도에서도 신사 참배에 항의했던 기독교인 약 2,000명이 투옥, 50명 이상이 옥사, 약 200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피해를 입었다.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국민을 ‘일왕의 군대’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 ‘군국 신사’였고 일왕제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한 강력한 수단이었다.”라고 말했듯이 야스쿠니신사는 일제의 대외 팽창 정책에 따라 제국주의 침략 이데올로기를 확장하는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본질이 변질된 야스쿠니신사는 세계적인 재앙의 근원으로 타락했다.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등 아시아인들이 신도와 일왕 숭배의 제단에서 피의 제물로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2004년말 현재 야스쿠니에는 메이지 쿠데타 때 사망자 7,751명, 서남전쟁 6,971, 청일전쟁 13,619, 대만정벌전쟁 1,130, 의화단의 난(北淸事變) 1,256, 러일전쟁 88,429, 제1차 세계대전 4,850, 제남사변 185, 중일전쟁 191,218, 만주사변 17,175, 태평양전쟁 2,133,915명 등 총 2,466천명의 전사자를 군신(軍神)으로 올려져 있다.(유골은 없으며 숨진 전몰자(戰沒者) 2백46만여 명의 레이지보(靈爾簿:전몰자 명부)를 보관하고 있다)

한편 이 신사에는 일제 때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한국인 희생자 2만 1000여 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한국 국보가 숨겨져 있다.

한편 이곳 야스쿠니신사 뒤편 숲 속에는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1백여 년 전 일제에 의해 강탈돼 내 팽개쳐져 있었다. 북관대첩비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장군이 민병 약7천 명의 의병단을 조직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휘하 왜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때인 1707년 함경북도 길주에 세워졌던 전공비(戰功碑)이다. 높이 1백87cm.폭 66cm.두께 13cm 크기에 의병단의 활약상을 담은 약1천 5백 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일으킨 1905년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라 마시스케가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대첩비를 강제로 강탈해 야스쿠니신사에 갖다 놓았었다고 한다. 이는 문화재 약탈이라기 보다 그들의 비굴하고 치욕적인 역사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대첩비는 2000년 봄 전쟁기념관인 '유슈칸(遊就館)' 확장공사 구실로 숲 속으로 옮겨졌으며, 안내판도 없어 일반인들은 대첩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찾아가도 높이 3m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었다. 신사측은 "계속 북관대첩비를 현 위치에 놓아 둘 계획이나 도로공사 뒤엔 숲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숲이 울창하여 낮에도 어두컴컴해 대첩비가 있는지 확인이 힘들 정도다.

한국에선 민간 중심으로 대첩비 반환 요구 움직임이 있었다. 80년대에는 이 비를 최초로 발견한 최서면씨를 비롯한 鄭장군의 후손들이 반환 요구를 했으나 거절 당했고, 99년에는 '북관대첩비 반환추진위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사측은 "남북 통일 뒤 통일정부가 정식요청을 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 반환할 수 없으며 가져올 때와 같이 남북이 하나가 돼야 하기 때문에 북에도 반환할 수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정동(金晶東) 목원대 교수는 "일제 시대의 대포 등 무기와 군마(軍馬) 동상 등은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놓고, 강탈해간 이웃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는 숲 속에 팽개쳐 놓은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일본에 치욕적인 내용이 담긴 비석을 숨기려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줄면 몰래 파괴할 가능성도 있다""통일 후 돌려주겠다는 것은 궤변이고, 빨리 반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이후 남북한이 합동으로 끈질기게 일본측에 반환을 요구하여 북관대첩비는 2005년 10월 12일 반환을 확인하는 합의문에 서명하고 동년 10월 20일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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