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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점철된 메이지 쿠데타

 1853년 미국 페리제독(M.C.Perry)에 의한 일본 개항요구는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대였다. 당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는 유교를 장려하는 등 기본적으로 대외 평화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막부는 국내 사정과 세계역사의 흐름상 개항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판단하고 개항을 결정했다. 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막부의 외교를 매국행위라고 맹비난하면서 막부 타도를 외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츠마한(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과 요시다 쇼오인의 죠슈한(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현)이 연합한 세력이었다. 이들 세력들은 막부를 나약한 정부로 몰아 부치며 부국강병이라는 미명 아래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정복고와 서양세력을 물리치는 정책) 사상을 내걸고 준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68년 메이지 삼걸(三傑)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사진左),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사진中),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사진右)가 중심이 된 세력들이 고오메이(孝明)일왕을 독살하고, 메이지 일왕을 내세워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 즉 메이지 쿠데타이다.

하지만 이들은 막부를 대신하여 일본열도를 통치할 역량도 인재도 애초부터 없었던 집단이다. 이들은 막부시절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농민출신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이 하급 사무라이라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이토오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농민 출신의 하급 무사였다. 이들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칼등을 쓰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이 문과 무를 겸비한 1급 사무라이가 아니다. 권모술수와 잔인함을 무기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철학의 깊이가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이었다.

정권 찬탈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쿠데타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다. 하여 이들은 실권이 없는 메이지 일왕을 옹립하는 근왕도막(勤王到幕)을 주창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길에는 신분제 폐지 등 순기능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1. 메이지 쿠데타는 근대화라는 명분과 중앙집권제 왕정복고라는 상반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2. 왕정복고의 기치를 내걸면서 기존 고오메이 왕을 독살하고 그들과 코드가 맞는 메이지 왕을 내세우는 파렴치를 범했다. 이것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3. 그들의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서 왕을 방패막이로 삼고자했다. 오랜 세월 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일왕을 최고급품이라 불리는 보석 '교쿠(玉)' 즉 '살아있는 신'으로 부르게했다. 그리고 일왕을 숭배하는 국가신도를 만드는 등 왕정복고를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이 정권을 좌지우지하여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막부정치와 전혀 차이가 없었다.
4. 내각을 구성하면서 쿠데타에 참가한 출신 지역별로 안배하는 갈라먹기 식 패거리 정치를 도입하여 정치개혁이 되지 않았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일본 정치권에는 누구파, 누구파하듯이 계파별 패거리 정치가 형성되어 있다.
5. 개항을 했던 막부를 허약한 정부라고 맹비난하면서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들이 집권하면서 기존 막부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맺은 조약을 모두 인정하였다.
6 왕권을 제한하는 유럽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도 메이지 헌법 제1조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일왕이 통치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주권이 일왕에게 있다고 하여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침략전쟁 패전 당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7. 메이지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칙령 12호를 발동시켜 실제는 ‘국가신도’를 종교 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국교로 채택하였다.
8.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왕 즉 살아있는 신의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칙령(勅令)을 만들어 독재국가를 만들었다.
칙령은 어떠한 비판이나 불복종을 허락되지 않는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이 진실된 자료를 되도록 대중화하지 않도록 하여 그들의 무능력과 모순 등 허망한 정치력에 대한 국민들의 건전한 비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초법적인 제도를 말한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통치 목적으로 의회의 승인이 필요 없는 칙령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9. 어떤 뉴스든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것을 철저히 검열했다. 사전검열은 물론 사후 검열도 심했다고 한다. 오자 하나 때문에 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고 한다. 1898년 5월 24일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에서 全知全能을 無智無能으로 잘못 썼다. 이에 요미우리신문은 폐간을 면하기 위하여 즉시 호외를 발행해야만 했다고 한다. 세계 언론사에 글자를 바로 잡기 위하여 호외를 발행한 첫 신문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능력이 없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국가의 근본을 모순과 모순의 충돌이 일어나자 조작과 조작으로 연결된 토대 위에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숨어 있다. 이들의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은 내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들은 ‘적을 베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식으로 반대파를 무지막지하게 제압하는 ‘殺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즉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는 殺보다 德을 중시하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철학을 거부하고,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해주겠다’는 식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비열한 생각을 도입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전쟁과 악랄한 살인을 선택함으로써 300여 년간 지속되었던 평화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선택한 모순과 이중성, 무능력을 숨기고 국민들을 다잡기 위해서는 일왕이라는 상징적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조작하는 황국사상을 더욱 조작하기 시작했다. 황국사상이라는 망국적 사상을 조작하기 위해서는 역사조작이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또 국민들의 불만과 그들에게로 향한 칼끝을 밖으로 돌리기 위하여 사다 소이치로(佐田素一郞)를 비롯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주창한 정한론(征韓論)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정한론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역사조작이 진행되었다.

일본만이 세계 유일하게 우수하고, 이웃국가들은 미개하다고 비하한 ‘역사조작’과 ’황국사상’은 부모형제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약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인들은 부모형제 간에도 서로 죽이고 죽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나라. 살인의 전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 오늘날까지 속과 겉이 다른 일본인들이라는 비아냥의 시초가 된 것이다. 즉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위에서 무엇이라 하든 무엇이든 그들이 편한 대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브레이크 없는 우익과 군부라는 폭군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말하는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하면 정정당당하게 겐카에 의거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하지만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청일전쟁.러일전쟁,중일전쟁.진주만 공격 등 수많은 전쟁에서 보듯이 비겁하게 책임 회피, 야간 기습공격, 선제 공격하는 등 전형적인 3류 사무라이의 행동이었다. 어느 것 하나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와는 절대 거리가 먼 것이다.

일제의 아시아침략 전쟁 패전 당시를 되새겨 보자.
일제가 패전으로 치닫을 당시 '신의 나라'에 사는 것을 감사로 여기고 살아 있는 신을 위하여 죽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도록 제국헌법과 교육칙어로 세뇌시켰다. 일왕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교육받고 세뇌 당한 국민들은 하와이 ‘만세 절벽’이나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보듯이 ‘일왕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죽어 갔다.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 즉 알량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전원 자살을 강요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패전의 최정점에 서서 전쟁을 독려했던 사무라이들은 어떠했는가? 일본의 최고통수권자였으며 일본군대의 대원수를 겸임하여 패전 책임의 최정점에 있던 히로히토 일왕,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지 말지어다’라는 전진훈(戰陣訓)을 통하여 자살을 강요했던 전쟁 내각의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사진), 성병과 정신병을 빙자하여 도망친 오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그 외 현장의 이슬로 사라진 A급 전범들. 이들이 진정한 사무라이라면 당연히 자살로 그 죄를 씻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었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같은 자는 그 이후 수상까지 지냈다. 전후 일본 정치세력들의 대부분이 아시아침략전쟁에 직간접으로 간여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더욱 비열해 진 것은 오늘날 일본국민들이다. 작금의 일본은 일본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도조를 비롯한 비열한 사무라이들을 영웅으로 되살려 열광하더니 이제는 아애 ‘A급 전범은 전범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이 자랑하는 진정한 무사도인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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