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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의 역사적 서술

▲일제의 한국강점 기념 그림엽서 : 좌-병합을 축하하는 ‘일한합방의 노래’, 중-‘일한합방’으로 영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는 독일 이상이 됐다는 기념지도, 우-朝日新聞의 호외(한국강점자료집 제공)

19세기 후반 하급무사들의 반란으로 시작된 메이지 쿠데타는 근대 일본의 기초를 형성하여 오늘날 물질적으로 풍족한 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역사조작’에서 밝혔듯이 정신적으로는 영혼이 말살되고, 역사적으로는 역사치매에 걸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주장한 탈아입구론은 오늘날까지 그들만의 우월주의에 푹 빠져 ‘이웃이야 어찌하든 우리는 우리식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막가파식 속과 겉이 다른 비열한 민족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사다 소이치로(佐田素一郞),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로부터 시작된 정한론(征韓論)은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철학의 깊이가 없는 민족이었음을 증명하게 되었고 세계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수천 년간 그들의 선조국인 한반도를 불법 강탈하기 위하여 일본역사 교과서에 동아시아의 지리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우매한 국민들을 호도하였다.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하나의 팔과 같이 돌출해 있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기지가 된다. 배후지가 없는 일본은 방위가 어렵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 대어진 흉기가 될 지 모르는 위치 관계다.” 이리하여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한반도를 불법 강탈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1. 1876년 : 일본은 조선의 정황을 탐문한 후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조선2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교섭이 어럽게 되자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艦砲)를 동원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강화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재차 출동시켜 조선 수비병들의 발포를 유도하는 사태를 촉발시켰다. 즉 일본은 모방의 천재답게 1853년 미국 페리제독(Matthew.C.Perry)에 의거 일본이 개항(黑船의 충격)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 사태 이후 일본은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 그리고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곶(甲串)에 상륙하여 강제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876년 일본과 최초의 불평등 12개항에 걸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2. 1881년 :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본식 신식군대를 조선에 창설한다. 신식군대에 대한 의존도가 자연 높아지자 구 군영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부족과 13개월 간 군료(軍料) 미불사태가 발생하는 등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1882년 임오년에 구 군영소속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 살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3. 1889년 : 그동안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에서 거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제는 청나라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실례로 1883년 해군, 1884년에는 육군의 확충 계획을 세웠었고, 일년 예산중 군사비의 지출도 1884년에는 약 20%, 1890년에는 30%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1889년에는 징병제로 변경하였다.  


4. 1894년 : 강제적 개항을 성사시킨 이후 일제는 조선에서 쌀·콩 등 농산물을 매점매석하여 조선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으로 반출했다. 해안에서는 해상운송과 어업을 독점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러 방곡령(防穀令)사건과 동학혁명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일본은 동학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일방적으로 군대를 출병시켰다. 서울에 군대를 배치시킨 일본은 조선정부의 청나라에 대한 밀월 관계 파기와 청국군의 철병을 요구하며 조선정부에 대하여 폭거적인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그들의 요구가 조선정부로부터 거절 당하자 조선을 강탈하기 위하여 급기야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청나라 군함을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킨다. 결과적으로 일제가 일으킨 청일전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조선을 전쟁터로 삼은 제3국간의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을 선동했던 것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중심으로 한 호전적인 저널리즘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3월
①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요동반도(遼東) ·팽호도(澎湖)의 할양과 대만(臺灣)을 식민지로 할양
③ 전후 배상금 2억냥 지불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을 골자로 하는 청나라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을 강탈하기 위한 진일보한 발판을 마련한다.


5. 1895년 :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와 對 아시아 진출을 위하여 대륙횡단 시베리아 철도(Trans-Siberian Railways) 착공 중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남하정책의 차질을 우려하여 4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에 제동을 건다. 이른바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의 공동 권고안인 ‘삼국간섭(三國干涉)’사건이다.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은 요동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청일전쟁의 승리에 들떠있던 기세가 주춤해졌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구실과 삼국간섭에 대한 부당성 앞세워 미국.영국에 접근하게 된다.

6. 1895년 : 조선정부와 명성황후는 일찍이 가까운 일본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있던 차에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잔악성과 위험성은 당장 발등의 불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철저히 견제했다. 이른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이었다. 10월 조선정부로부터

▲당시 프랑스 일간지의 시사 만평. 조선의 지도를 반씩 밟고서 러시아와 왜소한 일본이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있다. 미,영,프,독의 관중이 흥미롭게 지켜 보고 있고, 세력다툼에서 패배한 청나라도 천막 너머에서 보고있다.

 철저히 배제 당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밝혔듯이 그들의 공적 1호로 여긴 명성황후를 세계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시해한다.

7. 1896년 :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저지른 일제는 친일 내각을 재조직했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인들의 반감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고종이 2월 일제의 간악한 술수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제3국의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니 일제의 처사는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고, 일제는 정치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1897년 :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일본의 간악한 의도를 분쇄하고자 1897년 8월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의 제국이다”라고 선포하여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국왕의 칭호를 ‘황제’로 고쳤다.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는 자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9. 1903년 : 하지만 일본은 끊임없이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쓰라 다로 당시 일본총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동년 4월 수뇌회의에서 했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일제와 러시아 간의 오랫동안 전개된 다툼을 적라하게 말해주고 있다. “ 우리는 한국에 대해 충분한 권리를 요구하고, 교환의 대가로 만주는 저들(러시아)에게 경영을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양보해 여러 해 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자.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떠한 경우나 어떠한 어려움이 닺히더라도 한국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요구를 주창하려면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전쟁을 해서라도 한국을 강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

10. 1903년 : 1895년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와 일제의 한반도를 둘러싼 끊임없는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자 대한제국은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외교적으로 대한제국은 엄중 영세중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덴마크.청나라 등이 승인했다.

11. 1904년 : 그러나 일제는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강점하고 남진하는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2월8일 인천과 중국 뤼순에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비열하게 야간 기습 공격한 후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2월 23일 하야시(林權助) 주한일본공사는 중립선언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하도록 강압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대신들을 감금 협박하여 강제 체결하였다.

▲한국은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전력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한국과 일본은 상호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다.

동년 8월에는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부에 두게 하는 '제1차 한일협약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해 갔다. 뿐만 아니라 군사.경찰.교육.왕실 업무 등에도 조약에 없는 고문을 초청 형식으로 두게 함으로써 이른바 '고문(顧問)' 정치가 시작됐다.

일제는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체결로 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후, 러시아의 제1태평양전대 기지인 뤼순(旅順)항을 침범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뤼순을 되찾기 위해 총 49척의 함대와 3천여 명으로 구성된 발틱함대(짜르함대)를 에스토니아 항구에서 발진시킨다. 그러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함대는 다수의 죄수들이 포함된 오합지졸들이었고, 서유럽을 나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를 돌고 인도양과 인도차이나를 거쳐 무려 9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당도하는 무모한 작전을 감행한다.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2만 9천 km를 항해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동해에 도착하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함대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고 만다. 49척 전투함중 3척만 남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 해전이 있기 전,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제에 참패하리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발틱함대는 1705년 11월 표트르 대제에 의해 창설된 이래 계속 보강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함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판단 역시 다를 리 없었다. 일본 국민 전체가 발트함대와의 해전을 국가 흥망의 기로라고 느끼면서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어뢰정 함장이 ‘세계 제일의 해군 장수인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승리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진혼제를 지내고 출전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공포와 불안에 싸여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어째든 이렇게 러시아함대가 일본에 패한 것은 일본이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의 부산물이다. 즉 지구 4분의 3바퀴의 항해에는 반드시 중간 기착지를 통하여 물.식량과 연료의 보급이 필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세계 각지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앙숙관계였던 영국은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와 대리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 함대의 중간 기착지를 제공하지 않았고, 보급품도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 연료 보급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러한 러시아 함대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동해에 도착한 것이다. 러시아의 ‘오판(誤判)의 전쟁’은 철학의 깊이가 없는 일제로 하여금 끊임없이 피를 부르게 되는 오만방자함과 과대망상증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으로써는 악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에 앞서 악수하는 러시아 세르게이 비테(S.Vitte) 재무대신과 일본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대신

12. 1905년 :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답게 선전포고도 없이 야간 기습을 감행했던것은 자본과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와 장기전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영국과 미국에서 모집한 외채로 조달하고 있었지만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할 수 있도록 미국에 비밀리에 중재를 요청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해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은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다음과 같이 러시아의 패배를 강요하고 한반도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러.일 강화회의를 알선한다. 동 조약 제2조에는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및 보고,감리 조치를 취하는 데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라고 명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監理權)의 승인
② 뤼순(旅順)·다롄(大連)의 조차권(租借權), 창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의 할양
③ 배상금의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 사할린의 할양
④ 동해(東海)·오호츠크해(海)·베링해에 있는 러시아령(領)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조인 안이 발표되자 일본에는 엄청난 사회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피해는 러시아보다 엄청나게 컸다. 러일전쟁으로 발생한 피해를 살펴보면 20개월 동안의 전비(戰費)는 무려17억1600만엔, 러시아군 사망자는 5만여 명이었지만 일본군은 110만여 명이 전쟁에 참가하였고 사상자 27만여 명중 사망자는 무려 8만6000명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집이 없고 천문학적인 전시 물가와 세금에 시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러시아로부터 영토 할양과 20억엔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츠머스 조약 안은 배상금은 전혀 없고 영토 할양이라고는 보잘것없는 남 사할린섬의 절반만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조약이 체결된 9월 5일 도쿄에서 발생한 폭동은 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시내 대부분의 경찰서를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번졌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동원하고서야 사흘 만에 겨우 진압했다.

 

       ▲ 포츠머스 조약문

13. 1905년 : 영국과 일본은 이미 1902년 남진하는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하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분할하기 위하여 제1차 英日同盟(Anglo-Japanese Alliance)을 체결한바 있었다. 이에 미국 루스벨트대통령은 1905년 7월 포츠머스회담에 앞서 W.H.Taft 육군장관을 일본에 밀파하여 당시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다음과 같은 ‘미·일비밀협약(美日秘密協約)’을 체결한바 있다.
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않고, 미국의 지배를 승인할 것
②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영·일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립할 것
③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할 것.

이 협약은 결국 일제가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미국으로 하여금 보장받는 대신에 미국의 필리핀 점유를 묵인한다는 교환조건으로 이루어진 일한병합의 예비 공작이었다. 일제는 같은 맥락에서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는다.

이에 앞서 1905년 1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John Hay)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여기에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은 러일전쟁을 종식시켜 동아시아에서 평화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 기록에서 1974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수상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루스벨트는 약소국가 한국과 필리핀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더러운 뒤거래를 통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자이다.


 14. 1905년 :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엎은 일제는 1905년 11월 당시 일본에서 제일의 실력가로 불리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진)를 한반도에 파견한다. 이토오는 일왕의 칙사를 자진한 자로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하여 '제2차 한일협약' 소위 '을사늑약' 을 강제 체결하였다. 회담장 안밖에는 하세가와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좌로부터 이완용,박제순,이토오 히로부미

착검을 한 일본군들을 배치시켜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을사늑약에 찬동한 대신은 8명중 5명으로 이를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다.

이토오가 고종황제를 협박했던 내용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밝히고 있다. “제국 정부가 여러가지 고려를 거듭해 이제는 조금도 변통할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다. 이에 대한 승낙도 거절도 당신 마음대로이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겠소? 대외관계에서 귀국의 지위는 장래에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져 더욱더 불리해질 것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니시요쓰쓰지 긴타카(西四公堯)가 1930년 작성한 [한말외교비사]를 살펴보면 “ 이토오는 서슴없이 회의장으로 들어와서는 언제까지 우물우물 생각한다고 해도 결말이 날 이야기가 아니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반대냐 찬성이냐 의견을 물을 테니 분명히 답해주길 바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한국대신들의 회의를 이토오가 사회를 보았고, 대신들은 협박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늑약의 제1조는 “일본국 정부는 도쿄 소재 외무성이 오늘 이후 한국의 대외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권 박탈, 통감정치 실시,보호국화를 규정한 이 늑약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서명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외교권까지 강탈 당하여 최소 한도의 기본 체제마저 잃고 일제의 준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제일 먼저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한편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 미국에 보낸 전문과 1906년 1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된 국서에서 을사늑약이 불법•무효임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조약의 명칭과 고종황제의 옥세 또는 황명을 받은 도서가 없는 을사늑약 원본

(용어정리. 그동안 우리는 이 조약을 '을사보호조약'이라 불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일제가 우리국민들에게 고종황제 정부가 힘이 없는 나약한 정부였으므로 일제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체결한 조약이였음을 호도하기 위하여 선전한 통칭을 국내의 지도자 및 학자들이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이 조약의 원문을 살펴보면 외무대신 박제순의 인장만 있고, 고종황제의 옥쇄는 찍혀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약의 명칭조차 쓰여져 있지 않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당시 고종황제를 비롯한 우리국민들이 일제에 보호를 요청한 적도 없거니와 동등한 조약도 아니었다. 이 조약은 일제에 의한 명백한 강제.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므로 향후 이를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15. 1906년 : 년초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은 일제가 대신들을 강제로 가둔 채 일본군인들의 위협과 강압 속에 이루어진 불법•무효이며, 황제 스스로 조약체결을 허락한 사실이 없음을 밝히는 친서를 중국에 있던 [런던트리뷴 London Tribune]의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를 통해 영국총영사에게 전달했다. 소토리는 같은 해 11월 [런던트리뷴]지에 기사를 실었고, 1907년 1월 16일 대한매일신보도 이러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또 고종황제는 1906년 6월 황실고문 미국인 헐버트(H.B. Hulbert)에게 미국 등 9개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벨기에.청나라) 국가원수에게 이러한 친서를 전달하게 하고 한국의 주권수호에 협조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하여 일제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망해가는 한국에 대하여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16. 1907년 : 1907년 6월 고종황제는 헐버트의 권유로 이러한 친서를 가진 이 준을 비롯한 특사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시켜 국제적으로 이슈화 시켰다. 이 사태로 인하여 일제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등 당황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사사건건 일제에 반기를 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 시켜버렸다.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었기에 이들은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스슴없이 저질러고 있던 자들이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고종의 친서

그들은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고오메이 일왕을 독살하고,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했듯이 고종황제 역시 그들의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고 폐위시켜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일제는 8월 한국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는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당시 얼마나 격렬한 항일 전투가 벌어졌는지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 발행한 일본군의 공식보고서 [조선폭도토벌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07년 전투 횟수 323회 의병의 연인원 44천명, 1908년 1452회 69천명, 1909년 898회 25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폭악한 살육 현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책임을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촌읍으로 돌리고, 마을을 모두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효율(曉諭;알아 듣도록 타이름)했다. …..토인(土人;현지 주민)들 역시 그들 폭도에 대해 동정하고 비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토벌대는 위의 고시에 근거해 책임을 범법을 저지른 촌읍으로 돌려 주륙(誅戮;학살 또는 베어버리다)을 가하거나 온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는데, 충청북도 제천 지방 같은 곳에서는 눈에 띄는 한 거의 초토화돼버렸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맥켄지( F.A. McKenzie)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 현장의 상황을 [대한비극](1908)과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1920)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 일본군은 증원병을 급파해 몇몇 전투를 치른 끝에 재점령했다. 그들은 그때 제천을 지방 주민에게 보여줄 보복의 본보기로 삼기로 작정했다. 온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불상한 개와 관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피난 갈 때 남자 5명, 여자 1명, 그리고 어린아니 1명은 몸을 다쳐 따라가지 못했다. 이들은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친일파로 알려진 맥켄지도 일제의 참혹한 살육을 이와 같이 여과없이 기록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관으로 의병 학살에 투입되었던 이마무라 토모(今村)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의 신문 등도 한국의 일을 아예 문제 삼지 않았다. ………… 2,3행으로 처리해, 이웃 나라에서 대사변으로 동포가 참해(慘害)되고 있는데도 감각이 무뎌져 다른 사람의 일처럼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해는 그야말로 일국의 대란(大亂)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1909년부터 다음해까지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통해 항일운동을 벌렸던 항일투사들을 무자비하게 싹쓸이 학살시켜버렸다.

 

17. 1910 : 안중근의사에 의해 저격 당한 1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增彌荒助)에 이어 1910년 7월 23일 일본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3대 통감으로 한반도에 부임한다. 데라우치는 군 출신답게 부임 단계에서부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나갔다. 조약의 마지막 단계에 군 출신이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뒤에 언급하지만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을사오적에 대한 성토문

 

황제를 급박하고 대신들을 감금.협박하여 마침내 8월 22일 일한병합에 대한 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 조약 안은 8월 29일 발표된다.이로써 1910년 8월 29일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뜻인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유사 이래 우리민족 최대의 치욕이었다. 황실의 존엄성은 일제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혔고, 한민족은 행정•군사•외교권 등 모든 주권을 빼앗겨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후 통감부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에 나섰다. 한민족은 1945년 8월15일 광복될 때까지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조약안을 기초하는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뒤에서 언급했듯이 을사늑약을 완전히 무효라고 주장했던 당시 일본의 외무차관이었던 국제법학자 구라치 데쓰키치(倉地鐵吉)였다. 이러한 구라치가 당시 조약의 명칭을 정함에 있어 여러가지를 고려했음을 고마쓰 미도리(小松綠)가 1920년 저술한 [조선병합의 이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이 완전히 폐멸돼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됐다는 뜻을 명확하게 함과 동시에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단어를 선택하려고 여러 가지를 고려했지만, 끝내 적당한 단어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아직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 단어를 쓰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구라치는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폐멸시켜 일본영토로 ‘병탄(倂呑)’시켰다는 말은 아무래도 침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병합’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용어정리. 그간 우리는 이 때의 사태를 ‘한일합방’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일제가 간악한 의도에서 조작하여 우리에게 주입시킨 것을 우리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인 것에 불가하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때의 사태를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일한병탄(일한병합)’ 또는 ‘경술국치’로 불러야 한다.

그 이유는
1. 교린관계 즉 대등한 국가간의 조약은 자기나라 명칭이 먼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한일합방’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것은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성사시켰다는 뜻을 내포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약은 고종황제를 비롯한 대한제국 국민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일부 매국노들에 의거 체결된 조약이었으며, 일제에 의한 일방적.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대등한 조약이 결코 아니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메이지쿠데타 시절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주장한 정한론에 의거 수십 년에 걸쳐 치밀하게 계획된 조약이다. 그러므로 '일한합방'은 존재했는지 몰라도 '한일합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한일합방’이라는 뜻에는 한국이 일본을 합방했다는 뜻이기 하다. 우리가 언제 일본을 합방한 적이 있었는가?

2. ‘합방’, ‘합병’이라는 용어는 대등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을 강탈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하게 획책했던 일본추밀원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외’라고 했고, 한국을 강제 침탈한 후 그 결과를 일본왕에게 보고한 데라우치 통감의 보고서 제목에는 ‘한국병합시말’이라고 했다. 즉 일제가 한국을 강제 침탈할 당시 용어를 ‘병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방’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뒤에서 언급했듯이 일제가 한국을 강제 침탈한 후 24년이 지난 시점이다. 1934년 11월 ‘일한합방기념탑’ 제막행사 때 처음 등장한다.
이것은 일제가 ‘병합’이라는 용어에서 풍기는 ‘강제적 침탈’ 뉘앙스를 없애기 위하여 ‘합방’이라는 용어로 변경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 침탈한 후 24년이 지난 시점에 용어를 변경하였다는 것은 그 동안 ‘강제적 침탈’이라는 뉘앙스를 지우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강제 침탈 당시 관여했던 국제법학자 구라치의 고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대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합방’이라는 말도 사용해서도 안 된다. 만약 우리가 '한일합방'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가 일제의 처사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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