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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절대 덮어지지 않는다


생존자들의 증언


○ 아시안 블루

영화 <아시안 블루>는 지난 95년 ‘교토 건도(建都) 1200년 및 종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본 교토와 마이즈루, 시모키다 등 3개 지방의 시민단체가 모여 시네마워크와 공동으로 만든 영화다. 이들 단체는 시민들로부터 4천만 엔을 모금해 제작비에 보탰고, 시민 4천 명이 무보수로 촬영 현장에 참여해 군중 장면을 찍었다. 전체 예산 3억 원을 들여 만든 이 영화의 감독은 호리카와 히로미치로이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지낸 뒤 독립하여 사회성이 강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우키시마호와 관련된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과 죄상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주인공은 징병을 거부해 강제노역장으로 끌려온 한 일본 지식인. 그는 작업 중 사고를 당했을 때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은 뒤로 한국인들과 연대감을 형성해 간다. 한국인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가 징벌방에서 고초를 겪기도 한 그는 일제가 패망한 후 우키시마호를 타려는 동료 한국인들을 말린다. 이 배의 목적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을 일본인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비극을 맞는다.

이 영화는 우키시마호의 침몰과정을 직접 비추거나, 그 원인을 파헤치지는 않지만 일본인의 눈으로 이 사건이 의문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아울러 일본인으로서의 죄책감을 떨치지 못해 가족을 버리고 마이즈루 지방을 떠돌며 늙어가는 주인공의 쓸쓸한 삶을 통해 당시 역사의 비극성을 부각시켰다.

한편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1977년 8월 13일 일본공영방송 NHK는 <폭침>이란 제하에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되었으며, 1992년 부산의 극단 ‘새벽’이 ‘폭침- 우키시마마루는 부산항으로 못 간다!’라는 제목으로 연극화했다. 1995년 8월 3일에는 이성민(李性旻) 작·연출의 ‘피의자- 우키시마호 폭침에 관한 단상’이란 이름으로 부산의 소극장 실천무대에서 다시 상영됐었다.

2000년 북한에서도 우키시마 폭침 사건을 <살아있는 영혼들>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에 대하여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이 영화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현해탄에서 생죽음을 당하게 된 수천 명의 조선 사람들이 일제 야수들을 절규하는 울부짖음이 끝없이 메아리 치는 것”으로 끝났다며 “역사적 사실을 진실되게 반영하고 있는 이 영화는 일제의 범죄적 만행으로 숨진 조선 사람들의 영혼들이 오늘도 일제야 말로 우리 인민의 철천지 원수이며, 수난에 찬 과거를 절대 잊지 말고, 일제의 엄중한 죄행을 반드시 결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새겨주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 김동천씨(충북 영동)
징용영장이 나와 가족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하고 1943년 5월13일 일본 순사에 의해 강제로 연행돼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에서 일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고 구타가 심했다. 사건 당일 일본 해군들은 위스키를 마셨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한다고 갑판위로 모이게 하고 한국사람들은 선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해군들이 보트를 타고 내리는 것이 의아스러웠는데 갑자기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배가 가라앉으면서 바다는 온통 기름 투성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기름으로 까맣게 덮여 있었다. 여자와 어린애들은 거의 다 죽었다. 갑판 위에 있다 민간인 어선(구조선)에 의해 살았다. 당시 배에는 75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승선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고로 2500명만 살고 나머지는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초에는 송환 한국인을 원산항에 내려 놓는다고 했는데 돌연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 김수득씨(경북 상주시)
1937년 일본으로 건너와 나라현 단추공장에서 일하다 아오모리현으로 옮겨 오미나토의 군사시설 공장에서 터널 파는 일을 했다. 사고 당일 항해 중 해군들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몽둥이를 휘둘렀고 한국인들을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우키시마호가 폭발하기 직전 배 중앙부에서 해군들이 탈출하는 것을 보았는데 해군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 잠시 후 ‘쾅’폭발 소리가 들렸다. 순간 바다에 떨어져 떠다니는 보따리를 잡고 있다 민간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이 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찾으려고 해안가로 나갔는데 시체가 퉁퉁 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4∼5일 뒤에도 수천 구의 시신이 해안가로 밀려왔지만 누가 누군지 몰라 찾을 수 없었다.

○ 한세열씨(충북 영동)
아버지한테 징용영장이 나왔지만 대신해 일본에 갔다.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 근처의 해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에 들어갈 때 해군들과 장교들이 모두 빠져나갔는데 바로 배가 폭발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해군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폭파 침몰이었다. 이때 장인, 장모, 손아래 처남과 임신한 부인을 잃었다.

○ 오상필(여·서울 중량구)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 오미나토의 식당에서 일하며 비행장 격납고, 방공호를 파는 한국인 노동자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우키시마호를 타면 밥도 주고 배 삯도 받지않고 고국으로 돌려 보내준다고 해 아오모리현의 한국인 거의가 승선했다. 부산으로 간다고 하던 배가 갑자기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나더니 다시 ‘쾅’하며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리를 크게 다쳐(갈비뼈 2개 부러짐) 기어서 6개월 된 딸을 간신히 안았다. 바다에는 빠진 사람이 올챙이처럼 많았다. 민간어선을 타고 구조되었다.

○ 이재석씨(경기도 의왕시)
아오모리비행장에서 발파공사를 위해 징용됐던 그는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떠나 항해할 때 승무원이었던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오늘만 넘기면 부산에 무사히 갈 수 있을 텐데…’라고 여러 차례 지껄이고 다녔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이상하게만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일본이 처음부터 한국인들을 귀국시킬 의도가 없었으며 조선인을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시킬 사전계획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채길영
1943년 징용 당시부터 45년 8월24일 우키시마호 폭침 때까지의 상황을 적은 ‘일망후 상담 경력사(日亡後 相談 經歷事)’라는 제목의 기록에서 그는 한국인 승선자가 1만 2천여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우키시마호 승선하기 하루 전날 일본인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이 땅속에 감춘 물건을 모두 꺼내 바다에 버리자 조선인들이 이를 서로 가지려고 다투자 일본인들이 하는 말이 ‘만약 무사히 3일을 지난다면 주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며 일본이 계획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파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기록에는 우키시마호가 폭파하기 직전 일본군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조선인들에게 하층으로 내려가라고 내몬 후 군함에 딸린 소형 배들이 일제히 육지로 나간 후 배가 침몰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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