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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觀音寺)

세끼 고센(關光禪)주지

일본 지바(千葉)현 야치요(八千代)시는 자위대 나라시노(習志野)부대가 있다. 1923년 9월 1일의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모아 놓은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3천여 명의 한국인이 수용됐다가 일부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실제로 불이 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 돌아 시민들에 의해 6명의 한인들이 처형됐던 곳이다. 이들은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졌다.

▲법현스님외 7명이 벌인 범패 영산재 공연(조선일보)


근처의 관음사(觀音寺)에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오랫동안 공양을 했었다, 이를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지난 1985년 단청을 입힌 ‘보화종루’와 괘종을 만들어 기증하였다. 사건발생 80년 후 2003년 8월 31일 무더운 날씨 속에 보화종루에서는 종소리가 수십 번 울려 퍼지며 관동대지진 80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법현스님 외 7명의 범패 공연, 김유감씨를 비롯한 19명의 새남굿, 이애주(李愛珠) 서울대교수의 진혼무 등 공연이 이어졌다. 무려 세 팀의 인간문화재가 참여한 위령제였다. 이 위령제는 대지진 발생 당시 일본정부에 의거 이국 땅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된 2만여 명의 한국인 원혼을 달래는 추모 위령제였다.

이 절의 세끼 고센(關光禪)주지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오랫동안 공양해 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세끼(關) 집안이 주지를 계승해 현 주지스님인 세끼 고센(關光禪)은 25대째이다.

1985년 종을 만들 때 건립문에 “오늘의 한국인은 어두운 역사를 미워하고 슬퍼할지언정 오늘의 일본, 일본인을 꾸짖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1954년 관음사의 주지가 된 세끼주지는 관동대지진을 직접 경험은 하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 부근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어 러일전쟁시의 소련인 포로, 청일전쟁의 중국인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곧 유언비어가 퍼졌대요. 유언비어 내용은 「조선인이 민가에 방화를 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화재를 당한 사람은 없었지요.”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고 9월 5일경 군으로부터 조선인을 데려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부근의 다까즈(高津) 농민들은 조선인을 인수하러 가야만 했어요. 이 절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나기노하라(ナギの原)라는 공유지가 있는데, 농민들은 관청에서 조선인의 손을 뒤로 묶은 채 데려와서 나기노하라에서 눈을 감기고 일본칼로 베어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어요.”
“나기노하라에서의 공양은 1959년경부터 선대에 의해 시작되었지요. 어느 날 마을에 살던 노인이 절에 찾아와서 조선인 학살자들의 공양을 하고 싶다고 해서 위령푯말을 세우고 매년 9월 학살된 장소에서 위령제를 올리게 되었어요. 전쟁이라면 몰라도 관동대지진은 전쟁도 아닌 당시 정부의 모략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에요. 공포의 시대·군국주의의 악업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1973년 관동대지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치바현 내 각지에서도 조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 성과를 자치체 문화연구소 후나바시(船橋)지소가 자료집 1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후나바시시와 그 주변』을 정리했다. 1978년 6월 「치바현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사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실행위원회는 군대내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자료집 제2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나라시노(習志野) 기병연대와 그 주변』을 발행했다. 1983년 실행위원회가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人』를 아오키(靑木) 서점에서 발행, 그 후 9월 10일에는 관음사, 다까즈구, 실행위원회가 주최하는 위령제가 열리게 되었다.

유해발굴에서 관음사 안치까지
주지스님은 “발굴 공양은 구민(區民)이 회합을 열어 구민 전체 의견으로 실현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 희생자에게 죄송하나, 마침내 염원하던 발굴이 실현되어 다행이에요. 1998년 9월 24일 오전 8시 탈령식(脫靈式)에 이어 발굴 작업을 시작했어요. 증언을 토대로 나기노하라를 굴착기로 작업, 12시 15분경 유골이 나왔고, 저녁 5시경에는 발굴이 종료되었어요. 유골은 정성껏 물로 씻어 일단 관음사 납골당에 안치한 후, 화장을 하려고 야치요시에 접수했으나 유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는 등 곡절을 겪었지만, 화장을 끝내고 3개의 항아리에 담아 관음사로 옮겨 왔어요.”

1999년 9월에는 고즈지구 특별위원회와 추도조사실행위원회, 관음사의 합의 하에 위령비도 완성되었다. " 현재 위령비 밑에는 희생된 조선인 6명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학살의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측에 의한 사죄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뜻 있는 주지스님의 배려로 관동대지진의 희생자들은 관음사에서 그 영혼을 위로 받고 있다.
“사건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일본인으로서 면목이 없어요. 참으로 야만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 이러한 참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사실을 정확히 널리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일본 전국에는 학살당한 한국인을 달래는 위령비가 14~15곳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치바현 야치요시의 관음사는 관동대지진의 비참한 역사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적지가 되었다. (
www.5858.pe.kr 참조)

범종과 종루 건립
1985년에는 관음사 경내에 한국인 기부에 의한 범종과 종루가 설치되었다. 현대극장 대표인 김의경씨가 관음사의 위령제 이야기를 듣고 "대지진의 희생자에게 음지에서 이 같은 위령제를 지내 주어서 감사하다”라고 표하고 범종과 종루를 기증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고국에서 만들어진 종을 치면 희생자인 죽은 자들의 영혼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도 당시를 뒤돌아보며 반성시키는 데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1986년에는 한국불교회에 의한 위령탑 건립도 있었다.


◀관음사 경내 보화종루(普化鐘樓)(한국인과 일본인이 모두 평등하게 살라는 뜻)와 범종(보신각종의 1백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것). 한국인 현대극단 김의경 대표에 의해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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