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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학살 준비

제2학살 파티를 준비하라
2000년 12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사회부는 1910년 단행된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과 더불어 ‘관동대학살 사건’을 일본의 20세기 10대 뉴스로 선정했다. 그만큼 관동대학살은 세기적 대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이 대학살에 대한 어떠한 사과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일본 극우단체의 대표자 격이자 망언제조기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80년 전 악령을 되살리는 망언을 했다. 그는 2003년 관동대학살이 일어났던 똑 같은 장소인 도쿄 네리마(練馬)의 자위대 주둔지에서 행한 연설에서 “삼국인•외국인이 흉악한 범죄를 되풀이하고 있고 큰 재해로는 소요(逍遙) 사건조차 상정된다"며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자위대가 출동하여 진압해 주기 바란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일본에는 타민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공존의 철학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 여러나라에 퍼져 생활하고 있는 재외 한국인들이 그 나라에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재일 한국인들만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이시하라의 발언 중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인’이다. 삼국인이란, 일본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만엔 지폐의 초상화 장본인인 메이지시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는 <學問のすすめ>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그를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중국.대만 등 제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로 치부한 이중 인격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을 이러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라고 하면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한 자이다. 바로 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역사조작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한국.중국.대만 삼국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로 치부하면서 일본인들을 인간 도살자로 만들고, 아시아와 세계를 살인의 광풍으로 인도한 것이다.

한국.중국.대만인들을 멸시하여 지칭하는 삼국인은 80년 전 민족배외주의를 선동함과 동시에 재일 한국인들의 대학살을 상정한 발언이었다. 이시하라의 이러한 망발에 대해 일본인들은 70% 이상의 지지도를 보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일본인들의 이와 같은 작태에 피해 당사자인 한국.중국.대만은 불 속으로 뛰어들 듯 더욱 전율시키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망언에 대한 일부 비판세력에 대하여 극우파와 극우 언론들은 ‘뭣이 문제냐’고 반격하고 당사자도 삼국인이란 외국인을 뜻하며 경멸용어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자기의 발언에 오해하고 있는데 유감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 청소년들이 전혀 죄의식 없이 재미 삼아. 경험 삼아 살인을 저지르듯이, 대학살을 저지르고도 반성이 없는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도자기 하나 만들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지도하고 한자,불교를 전파한 자가 바로 한반도인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삼국인은 바로 일본의 스승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일본은 아직까지 어떠한 배상이나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삼국인 발언은 또 다시 80년 전 악령을 부르겠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자위대를 출동시켜 치안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80년 전 치안을 핑계로 군대를 출동시켜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것과 똑같은 발상이다. 이는 戰前의 계엄령 체제와 다름없는 것이지만, 이시하라의 육해공 3자위대 출동 구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1999년 8월호 'VOICE'지에서 오부치 수상이 총사령관이 되어 "육해공의 '삼군'을 사용한 재해시의 합동 대구제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어느 의미에서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위압도 된다. ……여기서 하는 것은 시가전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발상의 근원에 대해 "나카소네가 방위청장관을 하고 있을 때 계획을 세웠지만 미노베 지사가 행하지 않았으므로 자네가 되면 시행하라는 아이디어를 제공받았다"고 말했다.

이시하라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들의 망발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미친개를 처단하지 못한 역사에 기인하며, 역사조작으로 점철된 일본의 평균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우익 정치인들은 한국인, 중국인들에 대한 진압을 정책화하고 있다. 1999년 11월 전 육상자위대 북부방면 총감 시가다 토시유키를 동경도의 '재해대책고문'에 임명하고, 그의 의견을 기조로 재해대책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봐도 군사적 색채가 짙은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관동대지진 때 출동한 근위사단과 제1 사단은 '경비당도군 소견' 이라는 보고서를 남기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부정인의 소탕을 요한다. 부정선인 집단의 감시 등에는 요컨대 기관총을 소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부정인, 부정선인: 당시 한국인을 비하하여 지칭함)라고 적고 있다. 이‘경비당도군 소견’의 총괄 취지를 받아들인 방위청은 1960년 '관동대지진에서 얻은 교훈'을, 자위대 경시청은 1962년 '대지진대책-연구 자료'로 정리하고 있다. 요컨대 전 자위대 총감이었던 인물을 재해대책의 '고문'으로 임명한 일례를 봐도, 구 군 및 자위대 등의 면면히 이어지는 한국인을 주로 한 아시아인을 적대시하는 재해시의 진압정책을 도쿄도지사는 구체적인 시책에 포함시킨 것이다. (arirang21.com참조)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이웃이나 마을끼리 또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부풀어 오른 민중의 불평불만이나 증오심을 엉뚱한 곳에 옮겨 발산시키는 것을 전위(轉位)라 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반항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바가지 긁는 소리로 희열을 느낀다든가, 부엌에 잠자고 있는 강아지 배때기를 들이 차 깨갱거리는 소리로 전위시킨 것도 그것이다. 과거 미국의 경기가 나빠지는 것과 백인의 흑인 린치 증가와는 정확하게 비례한다는 조사도 전위다. 바이마르헌법 이후 독일의 경제 침체로 중소기업과 중산계급의 욕구 불만이 높여갔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은 이 욕구불만의 탈출구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 학살을 내세워 전위시켰다. 그렇듯이 일본정부는 관동대지진 때, 재일 한국인 2만여 명을 무차별 도살시켰던 것도 천재지변에 의한 공포불안이 국가기반의 안위와 연결될까 봐 의도적으로 전위를 유도했었다. 일본정부는 그렇게 해놓고 유언비어에 의한 학살을 일본인들의 자위수단으로 변명하는데 일관해왔다.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4년간의 조사 끝에 ‘나라가 허위사실을 전파’하여, 전위 학살에 정부가 개입한 것을 공인하고 사죄를 권고했는데도 묵묵부답 국가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소인배 섬나라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은 80여 년간 현해탄을 울어 헤매고 있는 2만여 원혼들의 곡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일본의 언론들은 2003년 9월 대지진 8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언론은 일본의 방재능력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자연재해 상태에서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한국인.중국인 대학살에 대한 만행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수만 명의 원혼들에 대한 과거 청산 노력이나 반성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조총련 지방본부와 금융기관에 폭발물을 설치하거나 총격을 가하는 등 재일한국인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가하고 있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지적한 대로 메이지 쿠데타 때부터 시작된 악령의 민족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은 일한병합을 통하여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을 삼국인.조선인으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과, 관동대학살 사건은 차별하였다는 것은 증명하는 것이요, 역으로 일본 스스로가 일한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부 개인 및 기타단체에서는 양심적인 집회 및 추모제 등을 통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하고 있으나, 일본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비굴하게 뒤에 숨어서 개인 및 종교단체가 나서서 청소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국가의 존재와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처사이다. 참으로 덩치에 맞지 않는 비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런 작태를 보이고 있는 일본이라는 집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일본은 아시아 GNP 70%까지 차지했지만, Pax Americana, Pax Britannica와 같이 Pax Japonica시대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 민중은 역사를 되돌아보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의 교묘하고도 천박한 선동적 언동에 단호히 "노"라고 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에서 신뢰를 잃게 될 것은 물론이고 세계인들로부터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독일은 과거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를 학살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았고 학살현장에는 어김없이 역사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바라는 뜻에서 이다. 그러나 일본은 공식집계 6천여 명 비공식집계 2만여 명에 이르는 이 관동대학살 사건을 정확하게 올바로 전달되기도 전에 역사 속에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허나 이 관동대학살 사건은 역사 속에 진실로 용해되어 있어 일본의 뜻대로 잊혀질 사건이 아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는 자신과 가정의 이익.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현재가 있기까지의 과거는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눈 멀게 된다. 우리는 1923년 9월1일 관동대학살은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연결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일본의 책임 있는 해결책이 있을 때까지 결코 관동대학살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글,그림 www.5858.pe.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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