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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명성황후는 위대한 국모였다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 진언하는 일급참모인 명성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으로 일제를 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 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그녀의 위대함 놀라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속에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앞서 기술했듯이 황후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는 “(당시 일본으로써는) 대표적 인물인 민황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 ...중략...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제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친일세력을 구축하라
을미년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정세는 미니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 다단한 형국이었다. 일제는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들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하여 정한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에 3류 사무라이들은 역사조작을 통하여 한반도를 무력 강탈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기술했듯이 1876년 강화도조약을 비롯한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모방의 천재답게 서구의 나쁜 식민지정책을 본받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패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노세함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국가 최대 역점사업으로 아시아 진출을 위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의 분산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제의 입장을 지지하여 한반도로부터 한발 빼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일제는 침략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일제는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 강탈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목적과 이익을 대변하는 친일세력 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1894년 10월 2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백작이 주조선 일본공사를 자청하여 부임한다. 그는 일본의 외상.내상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이토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함께 근대일본정계의 거물인 원로(元老)였다 . 일본정계의 거물
실세인 이노우에는 강화도조약 체결 때부터 간여한 자다. 그는 조선에 대한 일체의 전권을 일본정부로부터 부여 받고 부임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조선 강점을 위하여 첫 번째 손을 쓴 것은 조선 군대를 일본화.친일화 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895년 일제의 강제적 건의에 의해 조선 훈련대가 만들어진다. 조선군사를 일제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훈련대에는 일본인 교관들을 투입하여 일제에 의해 조정 받는 제1,2훈련대 각각 1천여 명의 신식군대였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견제와 박영효를 비롯한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혀 식민지화 기도가 차질을 빚자 이노우에는 휴가를 빙자하여 1895년 6월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자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내각회의에서 대조선 300만 엔 기증금 제공을 제의하였다.

1895년 7월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바꾸었다. 또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 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황후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미우라가 부임(서울도착:9. 1)한 후에도 17일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이노우에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입안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도적 위치에 있지도 않았던 행동대 대장 무장 미우라를 배후 조정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종범으로 만들고 그는 9월 21일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여 우 사 냥
뒤에 언급하겠지만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을 살펴보면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한 작전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가 우리의 위대한 국모 명성황후를 여우에 비교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는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Pax Britannica의 시대였으므로 모방의 천재 일제가 같은 섬나라 영국의 ‘푸들(개)’을 자처한 영향력으로 보여진다.

‘여우사냥’은 영국이 발생지다. 섬나라 영국은 동물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여우가 있다. 여우에 대한 천적이 없자 농촌에는 여우로 인한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대략 약50만 마리의 여우가 도둑고양이처럼 전국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여우사냥에 대한 역사는 봉건제가 자리 잡은 13~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잉글랜드 국토의 4분의1은 왕의 사냥터였다. 왕실 소유 사냥터가 아닌 지역은 귀족들의 사냥터나 마찬가지였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농촌에 많은 피해를 주는 여우들은 농장주들과 귀족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냥감이었다. 그리고 여우사냥은 17세기 후반 찰스2세 집권기에 귀족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다.

여우사냥은 격식.예절.복장 등 전통을 중시하며 18세기 기병대 장교 복장을 한 마스터가 지휘한다. 마스터는 20㎝정도의 구리나팔로 지휘하며, 마스터의 초대가 없으면 동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교활한 정도로 영리한 여우를 뒤쫓도록 지구력과 순발력이 뛰어난 수십 마리의 ‘잉글리시 폭스하운드’ 사냥개가 마스터를 따른다. 사냥개들은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지면 여우의 은신처를 뒤진다. 수풀이나 들판일 수도 있다. 사냥개들이 여우를 발견하고 짖기 시작하면 선봉에 선 마스터가 나팔을 울리며 “탤리 호(Tally Ho)!”라 외친다.

마스터는 여우를 몰아 사냥개에 물려 죽게 만든다. 그날 잡은 여우의 꼬리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성사냥꾼에게 기념물로 증정한다고 한다. 가끔은 머리와 발도 기념품이 된다. 몸뚱이는 사냥개에게 던져 준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동물학대라는 비난을 동물애호가들로부터 받아왔다. 토니 플레어(Tony Blair)총리는 1997년 집권하면서부터 여우사냥 금지를 공약했다. 이에 대해 찰스 영국왕세자가 "여우사냥을 금지하면 영국을 떠나겠다”고 응수할 정도로 영국 최고의 야외 스포츠다.

 2004년 9월 노동당의 여우사냥 금지법안 제출에 대해 “don´t ban fox hunting"을 외치며 여우사냥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영국 국회의사당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세계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적이 있다. 오늘날 여우사냥은 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거 미국.캐나다.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REUTERS PHOTO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마침내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등이 황후 시해에 관한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 시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또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제가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복궁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외국인들이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 서양관은 궁궐 수비 책임을 맡았던 몇몇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 세력인 훈련대를 해산 시키고자 했다. 마침내 시해사건 하루 전 훈련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우라 공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이틀 앞당겨 시행하게 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등 살기 등등한 낭인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앞세운 일본 군대는 궁궐의 추성문(秋成門:북서문), 춘생문(春生門:북동문)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공격한다.
궁궐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제의 습격을 받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약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총성이 울린 시각으로부터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불과 사십 오분 정도였다고 한다. 수비대가 순식간에 무너진 데에는 앞서 기록했듯이 일본식 훈련은 받고 일제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세력이었다.
궁궐문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대가 찾은 곳은 건청궁(乾淸宮)이었다. 평소 일본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명성황후 거처이자 시해된 옥호루

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곧 이어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령합(坤寧閣:玉壺樓)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옥호루다.

웨베르 보고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늘날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이 사태는 일본과 무관한 것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2001.11월 KBS는 이를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방송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駐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

▲웨베르보고서와 싸인(KBS 역사스페셜)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베르는 이 보고서에서 황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은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옥호루에서 시해하다

이 보고서는 시해 현장에서 일본 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의 중요한 증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황후가 어디 있는지 황후가 누구인지 만 물었다' 즉 시해범들은 황후 찾기에 만 혈안이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칼로 무장한 비열한 사무라이들이 황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것을 고종이 꾸짖자 이들은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폭행을 하여 주저앉혀 고종의 어의(御衣)를 찢었다. 또 태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특히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에는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비열한 일본인들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였다.

▲조선왕비 살해(리옹프와이어 1895)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황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라고 보고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황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황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일제 낭인들이 황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황후가 무사한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 황후의 처소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의 중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이 황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황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황후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황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황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한 상궁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바틴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 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 창문의 높이는 6피트(1m80cm)쯤 되는 듯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궁내부 대신 이경직)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 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명성황후기념관에 재현되어 있는 국상 장면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사건 직후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의거해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들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우송되었다. 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하여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웨베르보고서에 있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친필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 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낭인(浪人)이란

19세기 말 메이지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선낭인들을, 그리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한 사코와 같은 대륙 낭인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밀정으로 파견한 이들을 낭인이라 치부했다. 일본에서 ‘낭인’이란 일반적으로 깡패나 무뢰한들을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낭인이라 치부한 것은 일제의 처사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즉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열하게 변명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한성신보사 앞에서 기념 촬영한 일본 행동대원 낭인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일본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된 낭인들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다. 시해에 참가한 낭인들은 군인.경찰도 일부 있었지만 양복과 일본 정통복장을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으로 자칭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지식층들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낭인들 중 주범 이노우에가 입안하고, 무식한 무장 미우라고로는 행동대장이자 시해 사건의 종범이며,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낭인들을 모으고 동원한 총괄 모집책이었다.
이들 낭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
--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함.

--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겐조는 구 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는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했던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어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수집을 한 기관이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우리 민족의 수탈과 민족 정신을 파헤치는 친일언론의 심장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겐조는 구마모토(熊本)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들은 대부분 구마모토 출신들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자로서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함.
-- 시바 시로우(柴四朗)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 역할을 한 자이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며 1898년 중의원에 당선된 뒤 10선 의원을 지냈다.

그 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오사카 세이키치(大崎正吉), 토우카츠아키(藤勝顯), 하기와라(외무성경찰),기구치(菊池謙讓:신문기자),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한성신보 주필.한학자), 이에이리 가키쓰(家入嘉吉),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판매상), 사사키(의사),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카와 등 총 48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 후 일본에서 대부분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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