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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 조작


일본서기의 탄생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열도로 진출한 사실을 지우기 위해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 조작.변조된 역사(僞史)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또 "역사서가 아니라 삼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제국주의 신봉자들이 한반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내세운 ‘정한론(征韓論)’이나 한반도에 대한 우월주의를 강조할 때에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황국사관학자.우익집단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로 굳게 믿어 그들의 바이블로 삼는 최정점에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황국사관에 물든 위정자들은 조작으로 점철된 쓰레기와 같은 일본서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하기 위하여 오히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 한국사는 변조투성이므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출발한다.


 이조작된 일본서기의 탄생을 살펴보면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기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거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패망하고 만다. 이에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 일본서기에서는 귀실복신(鬼室福信)으로 표기됨)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하고 철저히 준비한다. 그러나 사이메이 일왕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복신의 영정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신라계와 권력 투쟁으로 암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어 38대 일왕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한다. 왜국은 미쓰게노노 와카코(上毛野椎子)를 장군으로 삼아 4백 척의 군함과 2만7천 명의 대군을 금강(錦江) 하구 백촌강(白村江) 전투에 투입한다.

663년 8월 왜의 대규모 지원군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인 주유성(州柔城)에서 신라에 크게 패한다. 왜의 지원군은 백제를 복국시키지도 못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일본열도로 쫓겨갔다. 이에 대하여 <구당서(舊唐書)>에는 “왜병과 백강 입구에서 맞닥뜨려 네 번을 싸워서 이겼다. 왜국의 배400척이 불타면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고, 바닷물은 붉게 물들었다. 적들은 대부분 궤멸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백제인들은 나라가 빼앗기자 지도층을 비롯한 유민들이 백제의 후국(侯國)인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백제유민들은 지금의 나라(奈良)시에 대거 정착하게 된다. ‘나라(奈良)’시의 유래는 이들이 빼앗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기분으로 살자고 하여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여 ‘나라(奈良)’라고 쓰는 것은 단지 취음(取音)하기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나라’의 유래에 대하여 들려주던 이야기를 김향수의 저서 <일본은 한국이더라>에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794년 칸무(桓武)일왕이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도읍지였다. 백제인들은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찬연히 빛나고 있는 일본 문화의 뿌리를 형성한 아스카문화(飛鳥文化-바다를 건너 새처럼 이 곳에 날아와 뿌리내린 문화라는 뜻임)를 꽃피웠다. 그리고 국가의 이름을 기존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한다.

백제인들은 일본사회에 안착하고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762년 일왕의 외척인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듯이(발해의 협공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함) 신라에 패한 마음의 앙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역사서를 통해서라도 신라에 패한 백제유민들의 한(恨)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과 백제는 우호적이지만 신라와 가야는 항상 정벌 대상이었고, 백제보다 하급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서기가 일본의 역사라기 보다는 백제의 역사 즉 ‘백제서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의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라현에 있는 백제사

 여기에 역사의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일본열도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숨기고, 백제의 역사를 일본열도의 관점에서 작성하였기 때문에 일본서기 곳곳에서 조작과 연도가 맞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왕국답게 일본서기를 복잡 괴기한 대하 픽션으로 만든 출발이다. 또 이는 일본인들이 역사조작의 바다에 빠져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오늘날까지 평화 철학이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712년 제40대 텐무(天武) 시절 백제인 히에다 노아레(稗田阿札)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현존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설화중심의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한다. 또 720년에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완성시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밝혀져 있으나 삼국사기나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반드시 나타나는 서문과 발문이 없음으로 편수년대.편찬경위와 편수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열전(志.列傳)도 없다. 일본서기에는 "텐무 일왕의 3째 왕자인 토네리신노우(舍人親王)가 칙(勅)을 받들어 일본기(日本紀)를 편수하다."로 되어 있다(일부 학자들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편찬 주장). 또 일본서기 텐무(天武) 10년(682) 조를 살펴보면 "제기(帝紀) 및 상고제사(上古諸事)를 정하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때부터 기록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편년체(編年體)로 쓰여진 ‘일본서기’에는 전을 가미한 것이 끼여 있어서 자료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41대 일왕 지토오(持統) 11년 즉 BC 660년부터 서기697년 11월까지 일본열도에 진출한 한반도인들의 왕조 형성과정, 왕권쟁탈전 등을 기록한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사기’에 비하여 많은 자료가 수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국가 사업으로 진행된 사서 편찬 소위 육국사(나머지는 속 일본기. 일본후기, 속 일본후기, 일본문덕일왕실록. 일본삼대실록)에서 보듯이 최초에는 ‘일본기’라고 하였으나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遷都)한 50대 칸무(桓武) 이후 ‘일본서기’로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명명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없다고 한다.

▲칸무일왕


일본서기를 태워버려라

그런데 일본서기의 제기, 왕통기는 칸무(桓武737~806) 왕이 ‘삼한이 일본의 모국이요, 동족’이란 기록에 불만을 가지고 불살라(焚書) 없애버렸다고 한다.

칸무왕은 백제 왕녀의 아들이며, 수많은 백제 미녀들을 후궁으로 거느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칸무(桓武) 50대 일왕의 생모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 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녀를 말한다.

이와 같이 칸무 일왕의 한일동족설에 기인한 일본서기 분서를 일본역사상 최초로 공표한 사람은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1293~1354년)이다. 그는 14세기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적 지도자였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桓武) 일왕 때에 불태워버렸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분서사건의 근거로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 참조했다고 한다. 코우닌시키는 제52대 사가(嵯峨)일왕의 지시로 편찬된 기록으로 거기에 칸무일왕이 책을 불사르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더욱이 일본서기 원본은 1467년 5월 오우닌(應仁) 대란(大亂) 때 불타 없어졌고 일부를 모아 다시 꾸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 나라현립(奈良縣立)도서관에 1669년 작성된 필사본 15권 남아 있다. 전 30권을 갖춘 것은 없다고 한다.
일본서기가 쓰레기와 같이 조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 '고사기전'을 저술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이 지목되고 있다. 이들은 고사기,일본서기,만엽집 등 고문헌 연구에 집착한 4대 국학자들로서 일본서기를 전면 해체하여 황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징구왕후 등 일본서기를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본. 필사본. 메이지쿠데타 시절 등 어느 시점에 조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高野新笠의 묘


일본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
1. '일본어의 비밀'에서 밝혔듯이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生)는 그의 저서 <사람은 왜 역사를 위조하는가>에서 일본이 역사를 조작한 사실들을 파헤쳐 폭로한 중요한 자료이다. 모리 前수상이 재임 중에 주권재민(主權在民)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듯이 나가야마는 일본이 신국(神國)으로 신앙하는 뿌리는 조작한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단언했다. 나가야마는 이 책에서 일본의 역사조작 주범으로
1) 일본의 정사(正史)라는 '일본서기',
2)  '일본은 고대부터 세계를 재패했다', '예수는 일본에서 죽었다'
3)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상기(上記)',
4)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칭기스칸은 일본인이었다' 등의 위서(僞書)를 꼽았다. 나가야마는 여기에서 일본서기를 최초 최고로 조작된 위서로 지목했다.

2. 마쓰모토 기요바리(松本淸張)은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왕실의 만세일계를 확립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해서 상당 부분이 왜곡되어 있으며, 왕실이나 중앙정부에 불리한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되었는데 이로 인해 객관성이 결여된 부분이 매우 많다.”라고 말했다.

3.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4.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는 그의 저서 <日本神話と古代國家>에서 “일왕의 기원을 가능한 오랜 옛날로 늘려 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일왕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 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고대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던 학설)에 입각해서 제30대 스이코(推古)왕 9년(601)부터 1260년 前 BC 660년을 진무(神武)왕의 즉위 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왕의 이야기도 일왕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5.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는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대륙인>이라는 저서에서 “인류학적 시작에서 고찰해 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족(移住族)들과 일본 원주족(原住族)의 비율은 대략 85%대 15% 정도이다. 이주족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6. 1949년 일본은 한반도와 같은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주장했던 전 동경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동 대학의 오리엔트박물관 관장.동아시아사(東亞細亞史)학회장을 역임했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중심으로 조작된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천황족(天皇族)은 대륙 및 한반도 방면으로부터 4~5세기에 일본 열도로 정복해 들어간 기마민족이다. 특히 미마키(美麻紀) 라는 별명을 가진 10대 스진왕(崇神王)은 가야에서 건너 온 황족이 틀림없으며 미마키란 스진왕이 살았던 옛 궁성의 이름인데 미마나(任那)를 일본 발음으로 미마키(みまき)라고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일본서기의 강림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들이 일본땅 이즈모와 규슈에 내려와 원주민인 땅의 신들을 무찌르고 지배하였다’에서 하늘의 신들이란 임나(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 즉 임금의 땅에서 건너온 황족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


7. 일본 고대사에 있는 쇼토쿠태자는 '헌법17조' 와 '관위(冠位)12계' 를 제정해 일본 국가의 틀을 잡았으며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해 불교 중흥에 힘썼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왔다. 그러나 오야마 세이치(大山誠一) 주부대학 교수는 "쇼토쿠(聖德)태자는 실존하지 않았다. 정치적 요청에 의해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등장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일본서기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했다.


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절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코무덤(鼻塚)'이 너무나도 잔인한 명칭에 고민하다가 ‘귀무덤(耳塚)'이라 조작 시켰던 당대의 최고의 학자였던 하야시 라산(林羅山)은 '천손(天孫)들은 모두 대륙(한반도)에서 건너 온 인물이다'라고 하여 일본서기가 위서임을 밝혔다.

9.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前구마모토 대학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는 박명미와의 공동저서 ‘아나타는 한국인’에서 “오늘날 일본어의 모어(母語)는 한국어이며,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전설은 전부 고대 한국인의 이야기다”고 말했다.

10. 근대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일본열도는 고대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한(三韓)과, 중국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씨족적(氏族的)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도호쿠(東北)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伊豆)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土着)해 살았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豪族)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집권을 이루기 위한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라며 한일동족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는 에도(江戶)시대의 도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을 비롯해서 메이지(明治)시대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년) 등의 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11. 일제시대 일본 사학계의 거두 쓰다 소기치(津田佐右吉)는 '징구왕후의 삼한 정복설은 가공이며 괴이한 헛소리'라고 일축하여 일본서기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3류 사무라이들은 극심한 견제와 생명의 위협을 가했다. 결국 쓰다는 일본 우익세력에 의해 재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쓰다는 그 이후 시대와 야합하여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제국을 위해 고대역사 조작에 앞장선다. 그는 일본서기에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이 근초고왕. 신라는 내물왕이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삼국사기 및 고대 한국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조작서임으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고 주장하여 일본학계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이것이 일본학계의 정설로 되어갔다. 그는 이러한 공노로 1949년 일왕으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쓰다와 우익계의 주장대로라면 백제와 신라 초기 400년 가까운 역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편 고대 한국사가 믿을 수 없는 조작서라는 일본측 주장에 대하여 박창범 서울대 교수가 삼국사기.중국.일본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이나 월식, 오행결집 같은 현상들을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으로 검정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삼국사기가 80%, 중국이 75%, 일본서기는 45%의 정확도를 확인했다.

그 외 역사학자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 아라타 에이세이(荒田榮誠) 등 수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일본서기가 조작으로 점철된 위서임을 밝혔다.


일본서기의 주요 조작 내용
1. ‘일본(日本)’조작

일본열도는 백제인들이 나라의 기틀을 잡기 시작한 7세기말까지는 삼한민족이 무주공산인 대마도, 이키(壹岐), 규슈(九州), 긴키(近畿), 간토(關東) 일대로 파상적으로 이주하여 여러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통일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고대사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마쓰라국(末盧國),노국(奴國), 후미국(不彌國).도마국(投馬國).왜국(倭國), 비미호(彌彌呼) 여왕이 지배하는 야마타이국(邪馬臺國) 및 구나국(狗奴國)등 여러 부족국가가 있었다라는 기록하고 있고, [한서] <지리지>에는 기원전 1세기경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 광개토태왕비 기록이나 일본이 4세기 백제가 일왕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하는 세기적 보물이라는 ‘칠지도(七支刀)’에도 ‘왜’라고 분명히 명문(銘文)되어 있다. 즉 ‘일본’이라는 국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일본학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倭가 ‘일본’으로 국호 변경을 한 것은 백제가 신라에 패망하여 열도로 대규모 이주했던 670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文武王) 10년 조에 보면 “왜국(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하였다. 또 신당서(新唐書)에는 함형원년(咸亨元年•서기 670년)에 일본열도에서 사신이 파견하여 와서 “왜라는 국명이 나쁘기 때문에 일본이란 국명으로 바꾼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최초의 日本국호 사용 년대를 초대왕 진무(神武) 31년4월 (BC 632년)까지 끌어 올려 약1300년을 조작하고 있다.
昔伊諾尊目此國曰日本者浦安國--曰虛空見日本國矣
(옛적에 이장약존이 이 나라를 가리켜 일본은 마음이 편안한 나라--하늘에서 본 일본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AD 200)에는 이렇게 조작하고 있다.

東有神國謂日本亦有聖王謂天皇
(동쪽에 신국이 있으니 일본이라 일컫고 또한 성왕이 있나니 천황이라 일컫는다.)


2.  ‘천황’ 호칭 조작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질서를 정함에 있어서 전제군주에 대한 호칭은 나라별로 일부 차이가 있다. ‘광개토태왕비 조작’ 항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는 ‘황제’라 했고, 고구려에서는 ‘태왕’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 조공을 하고 책봉관계를 유지했던 주위의 일반적인 국가들은 ‘왕’,'제후' 등으로 불렀다.

‘황제’와 ‘태왕’의 호칭을 사용했던 중국과 고구려를 살펴보면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통해 주위에 많은 국가들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았다. 그리고 나라간에 대등한 관계를 말하는 교린관계가 아닌 책봉관계를 이루었다. 이 두 나라는 세계 중심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독자적인 연호(年號) 사용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별을 연구하여 천문도를 그리는 특권도 누렸다.

그런데 일본서기와 일본에서는 천자를 의미하는 ‘황제’와 ‘태왕’과 같은 반열인 ‘천황’이라 사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 그 이유는
1. 조선시대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성일(金誠一)의 해사록(海槎錄)을 살펴보면 “실제로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자는 히데요시이며, 천황은 위황(僞皇)이다’라고 했고, 조선통신사들의 기록에는 ‘천황은 제사만을 담당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근왕도막(勤王到幕)’이라는 메이지쿠데타의 기치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지 쿠데타 이전까지는 쇼군 즉 막부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메이지 쿠데타 이전까지 일본국민들의 99%가 일왕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왕은 상징적인 존재 즉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2.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질서를 살펴보면 황제국만이 천문을 연구할 자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황제국인 고구려.중국에서는 많은 천문학이 발달했다. 하지만 일본열도에서는 천문을 연구하고 천문도를 작성한 적이 없다. 기토라 고분 천장에서 발견된 천문도는 고구려 평양을 중심으로 작성된 천문도로 고구려의 것이다.
3. 고대 일본열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섬이라고 하는 특수성 때문에 모든 문물은 한반도로부터 수입할 수 밖에 없었다. 조작된 일본서기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왜는 중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 제국 등과 교류하면서 활동했다. 하지만 백촌강 전투 패배로 일본열도는 한반도에서의 활동 영역을 잃어버린다. 왜왕권의 범위가 일본열도 내로 한정된 시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열도는 어떠한 조공국도 거느리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책봉관계를 맺은 나라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열도는 ‘임나일본부 조작’에서 밝혔듯이 야마타이왜의 히미코를 시작으로 15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까지 중국에 수차례 조공을 했고, 중국으로부터 금인을 하사 받기도 했던 분명한 책봉국이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에서 보듯이 조선과는 교린관계였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작성하고 있던 백제인들은 신라에 패한 것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인들은 신라를 깔보고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조작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신라.가야.백제의 복속을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살펴보면 중국과 고구려와 같은 천자를 의미하는 ‘천황’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허구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과 관련한 허황된 징구왕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상호 땔래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말하는 ‘천황’이라는 호칭은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를 감안할 때 주위 국가들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한 가당치 않는 호칭이요, 역사조작의 대표적인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향후 일본의 군주를 부를 때 ‘왕’이라 불러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하 일본 군주에 대해서는 '왕'이라 호칭하도록 한다.  
 

 

칸무일왕의 명령으로 건립한 오사카시에 소재하는 백제왕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

3. 건국년도(建國年度) 조작
앞서 기록했듯이 일본열도에는 백제유민들이 일본열도에 나라를 형성하기 이전까지는 여러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고, ‘일본’이라는 통일된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는 일본국 초대왕으로 진무(神武)가 BC 660년 신유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즉위한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10대 스진왕기(崇神王紀- BC 97년 즉위) 12년 3월 기록에는 스진왕을 어조국왕(御肇國王 - 나라를 처음 세운 왕이라는 뜻)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국 왕이다, 부족국가 왕이다를 논하기 이전에 이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일본서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무왕을 시조로 한 기원 자체가 조작되었음을 일본서기가 반증하는 기록으로 이 사실만 보더라도 건국년도가 무려 600여 년이나 조작하고 있다.

이는 신라에 패한 백제인들이 한반도와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본열도의 역사를 한껏 늘려보자는 계산으로 추정된다. 즉 신라의 건국 BC 57년, 고구려 BC 37년, 백제 BC 18년, 가야 AD 42년보다 앞선 년대를 기록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기원전 660년의 신유년을 진무왕 즉위일로 설정했을까.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참위설에 보이는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간지(干支 - 갑.을.병 등 10간, 자.축.인.묘 등 12지의 조합) 60년을 1원(元)으로 잡으면 21원은 1260년. 이 21원의 첫머리 신유년에 대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신유 혁명설인데 일본서기 편찬자는 601년의 신유년에서 역산, 그 1260년 전 신유년을 진무왕의 즉위 년으로 삼았으리라는 것이다. 진무왕의 즉위야말로 일본이 ‘신의 시대’를 마감하고 ‘인간의 시대’로 접어든 혁명으로 치부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째든 7세기 초 신유년을 기점으로 삼아 소위 초대왕 진무의 즉위년은 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은 메이지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끈 3류 사무라이들이 한창 역사조작에 혈안이 되어 있던 1872년 초대왕 진무(神武)가 즉위한 날을 양력으로 따져 2월 11일을 ‘기원절(紀元節)’이라 불렀다. 이 국경일은 일본이 아시아침략전쟁 패망 이후 폐지되었지만 1966년 경제성장으로 배가 부르기 시작하자 다시 ‘건국기념일’ 이란 명칭으로 국경일로 부활시켰다.

당시 일본사학자 이에나가 사브로(家永三郞) 동경교육대교수를 비롯한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은 “앞으로 일본서기 연구에 있어서는, 정치권력과 그 주구(走狗)에 의한 진실의 왜곡을 단호히 거부하는 강인한 과학정신을 갖추어야 하는 동시에, 여러 영역의 연구성과를 종합하기 위한 전문가 간의 협력이 절실히 요망된다”고 강조하면서 역사적 근거가 분명치 않은 이 건국기념일 제정을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황국사관에서 잠이 들깬 위정자들은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뭉개고 제정을 강행했다.


4. 가공(架空) 일왕
일본서기에 기록된 2~9대 왕들의 내용에는 세자책봉, 왕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적혀 있고 역사적 사실 기록은 전혀 없다. 일본서기는 진무왕(神武王)을 가공시조(架空始祖)로 만든 후 역사적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짜 왕을 만들어 넣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백제가 신라에 패해 일본열도로 도망간 7세기 후반 즉 40대 텐무(天武) 일왕까지는 부족국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맹 왕으로 조작했으며 표와 같이 재임기간을 고무줄과 같이 늘려놓았다

 왕 대

이 름

즉위년도

재임기간

왕 대

이름

즉위년도

재임기간

1 대 진무(神武)  B.C 660년 78년 9 대 가이카(開化)  B.C   151년 54년
2 대 스이제이(綏靖)  B.C 582년 33년 10 대 스진(崇神)  B.C     97년 68년
3 대 안네이(安寧)   B.C 549년 39년 11 대 스이(垂仁) B.C     29년 99년
4 대 이토쿠(懿德) B.C 510년 35년 12 대 게이코오(景行) 서기    71년 60년
5 대 고오쇼오(孝昭) B.C 475년 83년 13 대 세이무(成務) 서기  131년 61년
6 대  고오안(孝安)   B.C 392년 102년 14 대 쥬아이(仲哀)  서기  192년 8(78)년
7 대 고오레이(孝靈)  B.C 290년 76년 15 대 오오진(應神) 서기  270년 43년
8 대 고오겐(孝元王) B.C 214년 63년 16 대 닌토쿠(仁口) 서기  313~399 년  87년
 
뿐만 아니라 인술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100세까지 생존하기 어려운데 초대 진무(神武)왕이 127세, 12대 게이코오(景行).16대 닌도쿠(仁德)왕은 14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16대 닌토쿠(仁德) 왕까지 100세 이상 살았다고 하는 왕이 무려 13명이나 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1989년 사망한 124대 히로히토까지 평균 재임 기간을 산정해보면 그 허구성은 분명히 나타난다.

왕 대

재임기간

총재임기간

평균재임기간

1~      16대

BC660~  399년

1,059년/ 16명

66.2년

1~      40대

BC660~  686년

1,346년/ 40명

33.7년

1~    124대

BC660~  1989년

2,649년/124명

21.4년

17~ 124대

399 ~    1989년

1,591년/108명

14.7년

41~  124대

686 ~   1989년

1,304년/ 84명

15.5년

16대까지 왕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66.2년으로 17대부터 히로히토 왕까지의 재임기간 평균 14.7년과 비교하면 무려 4.5배에 달한다. 그리고 ‘기기’ 작성연대를 40대 텐무일왕을 가정하여 40대를 전후한 왕들의 재임기간을 비교해 보면 평균 2배가 넘는다. 10대까지 평균 재임기간을 한반도 제왕들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는 28.5년, 신라 30년, 백제 32년이지만 일본은 평균 63년으로 2배가 넘는다.
 
그리고 일본왕가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세계 어떤 나라, 어떤 왕실도 족보와 성이 있는데 비해 일본왕가는 히로히토, 아키히토와 같이 이름만 있고 성(姓)과 호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왕실의 계보는 일반인들의 호적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황통보(皇統譜)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이것을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역대 수상뿐이고 일반에게는 절대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가?
성(姓)을 가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역성혁명이 두려워서도 아니요, 모든 일본인들의 어버이로 조작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일본왕통이 바로 한반도 후손들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대한 열등감에 대한 반발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반도와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일본열도를 신국으로, 일본왕들을 신의 아들로 조작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셨던 히로히토의 본심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들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2001년 12월 25일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1984년 전두환대통령 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이코(推古 33대 592~628년 재위)일왕 이전 일왕의 역사는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왕 중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분이 일본에 도래하여 그 혈통이 일왕의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칠지도 조작’ 항에서 언급했지만 스이코는 여왕으로 그녀가 재위했던 시대는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를 비롯한 많은 문물들이 일본열도로 밀려들어 아스카 문화가 지속적으로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던 시대를 말한다. 이것이 고대 일본열도에 불었던 제1차 한류열풍 ‘구다라 나이(百濟無り:백제것이면 무엇이든 최고다)’ 열풍이다. ‘칠지도 조작’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열도에서 가장 세력이 강력했던 호족은 백제계 도래인 소가씨였다. 소가씨는 31대부터 35대까지 일왕을 천거 하는 등 일본열도를 좌지우지했던 최고 실세였다.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깊이 살펴보면 일왕가가 자고로 한반도 특히 백제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일왕은 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존재라 하지만 지금도 유.무형으로 일본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궁내성을 두어 철저히 베일에 쌓인 일왕가는 일본국민들에게 분명 ‘구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히토의 이와 같은 말이나 2001년 12월 23일 “칸무 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다”고 밝힌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들은 일본언론들이 철저히 함구하여 국민들의 알 권리를 차단시켜 왔다. 아사히신문과 같은 일부 언론만이 보도했지만 정치지도자들과 언론들이 만세일계로 포장된 궁성이 행여 무너질세라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일왕가의 탄생 비밀과 이미지는 궁성 담 높이와 같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5. 징구왕후(神功王后) 조작
동아시아 역사학계에서는 4세기의 일본역사를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한다. 이 말은 중국 진나라가 건국된 다음해인 266년에 야마타이국 왕 히미코의 뒤를 이은 이요(壹與)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413년 왜5왕(五王)이 사절을 파견하기까지 약 150여 년간 왜의 역사가 중국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가 아직기, 왕인박사 등 수많은 학자들과 백제의 문물을 일본열도로 흘러 보내던 시기이다. 역사의 여명기인 일본열도에 초기 백제 열풍(한류열풍)을 형성하던 시기이다. 즉 백제가 기나이(畿內.나라.오사카.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지역에 백제의 후국을 만들고 있던 시절이다.

하지만 조작된 일본서기에서는 4세기의 일본역사가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조작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까지 일본역사를 실타래처럼 헝클어버린 것이 4세기 역사다. 즉 조작된 일본서기 4세기에 등장하는 인물 징구왕후가 4세기 한반도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통치했다는 것이다. 황국사관에 물든 일본인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작된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징구왕후는 AD 148년부터 247년까지 100년 동안 살면서 14대 주우아이(仲哀)와 15대 오오진(應神) 일왕 사이에 나오는, 즉 주우아이(仲哀)의 제3부인으로 69년 간 섭정(攝政)을 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부족국가인 야마타이(邪馬台國)국의 왕인 그녀가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가야를 싸우지도 않고 정복했다는 애니메이션과 같이 조작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징구왕후(神功王后)가 혼자 배에 오르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노를 쓸 필요도 없이 곧바로 신라에 당도했다……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라왕은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감고 스스로를 포박하였다. 지도(圖)와 호적(籍)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왕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그 창이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쳤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조용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營外)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삼한을 직할지(屯倉)로 삼았으며 내관가(內官家)을 정하였다. 이가 소위 삼한이다. 왕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시초이다. 그런데 소설과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실제로 믿고 싶어하는 근거는 징구왕후기의 주(註)에 나오는 위지 왜인전의 인용부분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가 허구성으로 가득 찬 징구왕후기에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히미코와 동일이었다는 것을 넌지시 부각시킴으로써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일본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히미코에 관한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07년 왜의 면토국왕(面土國王)이 조공했다. 180년대 왜국에 대란이 일어나 그 난리 속에서 30여 개 소국들의 공립으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왕이 되었다. 239년 히미코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하였다. 구나국와 대립하고 있던 히미코는 240년, 243년 위나라에 사자를 보내와 원조를 요청했다.”

이 여인에 대한 이름이 중국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야마타이(邪馬台國)국 여왕 비미호(卑彌呼 :히미코), 삼국유사에는 세오녀(細烏女), 고사기에는 난생녀(卵生女), 김해김씨왕세계에는 신녀(神女),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神功王后)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연대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위지왜인전에는 그녀가 무녀(巫女)로서 그녀의 곁에는 항상 남동생 선견(仙見)왕자가 있어 국사를 보좌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그녀를 김수로왕의 둘째 묘견공주(妙見公主)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가. 하야시 세이고(林靑梧)교수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 사시요시히코(佐治芳彦)의 저술 <야마타이국말살(邪馬台國抹殺)의 미(謎)> 및 많은 일본학자들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 또 히미코가 다스렸던 북규슈 일대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매우 가깝다. 이 지역을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사실은 야마타이국이 가야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던 가야의 분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는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북규슈 일대에서 29개국 5만호를 평정하여 야마타이국의 여왕이 된 묘견공주 히미코가 일본왕가의 전설적인 시조 아라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라. 임진왜란 후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며 일왕 측근의 정치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천신은 실존 인간이며 삼한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마. 북규슈 후쿠오카(福岡)시 하카다구(博多區)에는 징구왕후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가 있다. 이 곳의 안내책자에는 ‘신대(神代) 이전에 이 곳에 온 것으로 알려진 징구왕후는 대륙에서 도항해 올 때 용맹스러운 수군을 이끌고 왔으며 신덕(神德)을 갖춘 왕족이었지 않나 추측되며, 따라서 저중표(底中表)라는 三神이 三韓이나 대륙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리고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 경내에는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소나무가 무척 많이 우거져 있다.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는 이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부르고 있다.
바. 묘견공주 히미코가 고대 일본열도에서 강력한 부족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문화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에서 밝히고  있지만 5세기까지 일본열도는 철을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철을 생산한 곳이 바로 가야다. 이러한 가야는 가야인인 야마타이국의 묘견공주가 강력한 부족국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철을 지원했다고 볼 수 있다.

징구왕후가 신라정벌 출전 때의 본거지라는 규슈의 오이타현 우사(宇佐)신궁을 답사해 보면 징구왕후의 정벌 과정을 대형 벽화들에 담아 화려하게 설치해 놓고 있다. 우사신궁에는 옛날 천손(天孫)이 강림했다고 하며 일본 전역에 4만여 신사를 거느리는 총본산이다. 각 신사에서는 징구왕후가 신라.가야.백제.고구려를 정복했다는 것을 정설처럼 선전하고 있다. 허구와 괴이한 소설과 같은 기록을 믿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징구왕후는 A.D 24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구수왕, 침류왕은 징구왕후 보다 훨씬 후대에 존재한 왕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가 그 이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조작되어 있어 년도가 뒤죽박죽이다. A.D 255년 징구왕후 55년 기록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근초고왕은 A.D 375년 사망했다.
징구왕후 56년(A.D 256년)기록 구수(근초고)왕 즉위 --실제 A.D 375년 즉위
징구왕후 64년(A.D 264년)기록 구수(근초고)왕 사망 --실제 A.D 384년 사망
징구왕후 65년(A.D 265년)기록             침류왕 사망 --실제 A.D 385년 사망

많은 일본학자들 중에서 특히 미즈노 유(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1978>에서 15대 오오진(應神)왕이 일본서기에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과 여러 사실들을 종합하여 백제계라고 밝혔다. 일본서기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징구왕후가 서기 247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4대 주우아이(仲哀)의 왕자이자, 서기 390년에 즉위한 15대 오오진을 낳았다고 조작하고 있다. 즉 일본은 만세일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가야계 왜에서 백제계 야마토왜로 넘어가는 약 140년의 공백기를 메우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 이렇게 조작하자 주우아이(仲哀)왕 사망 후 15개월 만에 오오진이 낳는 결과가 되자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가 허리에 돌을 감아 10달이 되어도 아이(응신)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15개월 만에 낳는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6. 야마토(大和) 조작
메이지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이 일본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살인과 죽음의 끝자락으로 몰고 갈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야마토타마시(大和魂)’이다. 아시아침략전쟁 당시에는 일왕 히로히토가 ‘大和魂’이 새겨진 머리띠를 어린 군인들에게 하사하여 이유도 없이 죽음을 강요할 때 사용했다. 경제성장기에는 개인의 욕구를 억제시키고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때 사용했다. 그러나 야마토라는 단어는 조작으로 점철되어 있고, 조작된 일본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사시요시히코(佐治芳彦)는 <야마타이국말살(邪馬台國抹殺)의 미(謎).1981년 9월>에서 “일제 때 일본은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역사와 야마타이국에 관련한 역사를 말살,변조하는 것을 최초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듯이 일본 학자들은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것은 야마토와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따라 역사조작으로 점철된 일본서기를 비롯한 황국사관 전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야마타이국에 대한 위치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경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고, 정기적으로 낙랑군에 조공하는 나라도 있었다라고 한다. <후한서><동이전>에는 57년인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에 왜의 나국왕(奴國王)이 조공했고, 책봉관계를 맺어 이에 대한 대가로 광무제(光武帝)가 지금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한위나국왕’이라는 인수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국왕 이후 147~189년 후한 시대에 왜국에는 큰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난리 속에서 180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30여 개의 소국을 지배하는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히미코는 239년 위나라에 사절단을 파견 조공하고 위 황제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 받았다. 더욱이 구나국(狗奴國)과 대립하고 있던 히미코는 240년, 243년 연이어 사자를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왜인전> 첫머리에 나와있는 야마타이국의 여정을 살펴보면 구야한국(狗耶韓國),이키(壹岐),마쓰라국(末盧國),이토국(伊都國),나국(奴),후미,도마(投馬)을 거쳐 도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이 지금의 규슈(九州)설과 아스카와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나이(畿內)설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4세기 기나이를 중심으로 했던 야마토조정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므로 4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야마타이국의 존재 위치를 규슈설을 따르게 되면 야마타이국 시대 뒤에 기나이 세력이 규슈를 정복했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기나이설을 따르게 되면 야마타이국이 야마토조정의 전신이었다는 것이 된다.

원래 기나이설의 출발점은 일본서기 징구왕후기의 주(註)에 일부러 <왜인전>을 인용한 데 있다고 한다. 야마토조정이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켰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징구 왕후인데 허구성이 강한 징구왕후에게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기록에 그와 히미코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점을 넌지시 비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야마토 조정이 중국황제에게 조공하여 복속돼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모토오리 노리나가(木居宣長),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규슈설을 주장하면서 만국의 중심인 일본이 중국에 조공해서 신하의 예를 차렸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징구왕후가 사방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점을 이용해서 규슈 지방의 구마소(熊襲) 등이 제멋대로 이름을 위조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명확히 하고 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의 유구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황국사관을 조작하고 있던 학자들이 중국에 복종하는 히미코를 야마토 조정의 역사에서 배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또 규슈설을 취하면 야마토조정의 통일 이전에 별도의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 되어 만세일계에 치명타가 되고, 기나이설을 취하면 일찍부터 야마토조정이 통일했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야마토조정이 중국왕조에 조공하면서 신하의 나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두 나라의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일왕가를 만세일계로 조작하기 위하여 일본서기가 너무나 황당하게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역사의 만세일계를 강조하려는 쪽은 히미코의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왜인전의 가치를 되도록 낮게 보려는 의도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떠한 결론도 못 내리고 있다. 어떠한 결론이 나든 규슈설은 가야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것이고, 기나이설은 후에 백제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역사를 조작하고 있던 일제는 엉터리 일본서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邪馬臺, 倭, 山門, 大和 등의 글자 모두를 '야마토'로 읽기로 통일하고 훈독이라며 변명하고 있다. 즉 일본열도가 통일된 국가로 조작하기 위하여 같은 발음이라고 조작했다. 이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모두를 ‘한국’이라고 우기는 격이다. 반면 야마토라는 나라를 일본이 사용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에서 BC 7세기부터 ‘일본’이 건국되었다고 기록한 것이 조작되었음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천신이 일본에 내려온 곳이 이즈모(出雲)와 츠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 두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초대왕 진무(神武)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했다는 동정설(東征說)과 연관 지어 보면 이는 천신 즉 가야계 사람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규슈 츠쿠시를 지나 기나이로 차츰 세력을 확대해 갔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문화 후기에 한인에 의하여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가 북규슈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라고 말한 것과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우에다(上田正昭), 에가미(江上波夫) 등이 “일본 왕실의 조상이 한반도 가야계였다”는 주장들은 규슈설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이에 대해 미즈노 유(水野祐),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등은 “남한에서 일본 북규슈에 강림할 때에는 니니기이고, 천신(외래민족)이 조선에서 북규슈로 이동할 때(제1회 왜국 건국)의 주역이 스진이라면 북규슈에서 기나이로 진출할 때(제2회 왜국 건국)의 주역은 오오진(應神")이라고 추정했다.

7. 기 타
초대 진무왕의 전설을 살펴보면 ‘그가 치쿠시(筑紫)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게 되었을 때 얕고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길을 잃었는데, 거북의 등에 탄 국신(國神)이 나타나서 길을 안내해 항해를 무사히 계속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주몽이 부여국을 도망치려고 할 때 시엄수(施掩水)라는 강이 앞을 가로막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가 돼주어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라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야기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40대 텐무(天武)의 기록은 고구려 연개소문, 42대 몬무(文武)의 기록은 신라 문무대왕의 기록과 너무 비슷하여 동일인 설이 나올 정도다.

그리고 역사가가 집필했다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40대 텐무왕기에는 사무적인 기록 위주로 엮어져 있는 반면 제14대 주우아이(仲哀)왕기에는 텐무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 전말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다. 또 텐무 왕비에 관하여는 징구왕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42대 몬무왕 이야기는 제15대 오오진과 제22대 세이네이(淸寧)왕기에, 제38대 텐지(天智) 이야기는 제12대 게이코오(景行)왕기에 기록되어 있고, 제36대 고오토쿠(孝德)왕 이야기는 제19대 인교오(允恭)왕기에 각각 나뉘어져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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