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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탄생

가미가제(神風) 탄생

침략을 당한 입장에서는 인정을 하고 싶지 않겠지만 세인(世人)들은 징기스칸을 시저와 알렉산더, 그리고 나폴레옹과 더불어 세계 4대 영웅(英雄)이라 한다. 오고 가지도 못하고 듣도 보지도 못하던 막막한 동서양의 대륙을 넘나들며, 세계 제패(制覇)의 야망을 불태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3세기는 몽고의 징기스칸(成吉思汗) 시대였다. 초원에서 야생마처럼 치고 받고 달리던 징기스 칸은 중국 대륙의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이슬람 여러 국가들, 러시아, 유럽까지 정복하며 천하를 말발굽 아래 짓밟고 있었다. 한 번 시작된 몽고의 정복은 멈추지 못하고 동아시아의 끝자락 고려까지 미치고 있었다. 1231년 몽고는 조그마한 나라 고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호락호락 하지 않는 고려였다. 세계를 말발굽 아래 두었던 몽고가 보기에는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였다.

그러나 몽고는 고려의 강력한 저항 앞에 1259년 항복을 받을 때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6차례의 전쟁을 치려야 했다. 몽고는 천신만고 끝에 고려의 항복을 받기는 했지만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단병전에 명수였고, 세계를 쥐락 펴락했던 몽고로서는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도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몽고와 30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온 나라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뿌리 온전한 것이 없는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려는 이런 전쟁 통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강인한 민족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웅혼한 정신은 바로 700여 년간 10배가 넘는 중원과의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반도를 손 안에 넣은 몽고의 야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몽고가 현해탄 건너편에 왜국(倭國)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1274년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서 강제 징발한 군사를 합쳐 3만이 넘는 병력과 900여 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지금의 마산 합포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몽고간장'이 마산의 특산물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다. 그리고 당시 몽고가 왜국으로 출병하게 된 이유가 ‘일본에는 금으로 만든 집이 있다는 헛소문을 듣고 그것을 강탈하기 위해서 출병을 단행한 것이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가 신라를 '금과 은의 재보의 나라'라고 생각하여 침탈하기 위하여 나선 것과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어째든 여몽(麗蒙)연합군은 오늘날 후쿠오카 하카타(博多)에 도착하였다. 몽고는 유목민이다. 1천호 병단제도라는 것이 있다. 1000명의 병사를 징병할 수 있는 크기의 가족집단을 기본으로 하며, 그것을 다시 100호,10호로 세분해서 각각 군사.행정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당연히 전쟁수행도 매우 조직적이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개인 플레이가 강하다. 게다가 패배한 적의 목을 배어서는 들고 다닌다. 전쟁의 목적이 공을 세워 토지를 하사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무모하게 싸운다. 즉 잇쇼켄메이(一所懸命:한 곳을 목숨을 걸고 지킴) 사상이다. 이것이 근대에 와서는 一生懸命(평생 목숨을 걸고 일함)으로 바뀌었다.

몽고군은 일본무사가 뒤쳐 나오면 어느 틈엔가 여럿이 달려들어 해치워버린다. 몽고군은 북을 치고 징을 울리며 요란하게 공격한다. 일본군의 말은 놀라서 날뛰고, 장수가 낙마하면 함께 달려들어 죽인다. 병사들이 밀집된 곳에는 짧은 화살로 공격한다.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으므로 한 발만 맞아도 운신을 못한다. 몽고군은 피아의 시체를 넘어 용감하게 공격한다. 장창을 가진 보병집단도 있다. 쇠구슬을 화약으로 쏘는 엄청난 굉음과 화력을 가진 철포(鐵砲)도 있었다. 싸움의 방식이 사뭇 다르다. 첫날은 일본군의 처절한 완패였다.

여몽연합군은 해가 지면서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부는 등 날씨가 좋지 않자 왜군의 야습을 대비하기 위하여 참모회의가 열렸다. 이때 고려의 사령관 김방경(金方慶)은 하카타에서 야영하면서 계속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총사령관 홀돈(忽敦)과 우부원수(右副元首) 홍차구(洪茶丘)는 배로 철수를 주장하였다. 고려의 사령관 김방경의 의견이 무시되어 연합군은 모두 배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음날 아침 해상에는 전날 몽고의 대규모 군함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때마침 불어온 계절풍 ‘태풍’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과 군함들이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高麗史에는 ‘때마침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군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침몰하였고, 김선(金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金銑은 고려군의 左軍副使였다. 일본 측 기록에는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몽고는 말을 타고 넓은 초원을 누비는 육지의 나라이다. 몽고 병사들은 육전에는 천하무적이었으나 바다를 낀 해전에는 철부지였다. 대륙을 훨훨 뛰날던 몽고군의 기개(氣槪)가 한 뼘 현해탄의 물결 속에서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가만히 있을 몽고군이 아니었다. 1차 원정 당시 뜻밖의 사고를 당한 몽고는 7년간 투항을 요구하는 외교전을 펼치면서 2차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은 또 다시 고려에 명령하여 4000여 군함을 건조토록 하고 고려에서 4만의 동로군을 중국 본토에서 10만의 강남군을 강제 동원하여 1281년 제2차 원정군(遠征軍)을 보냈다. 1281년 5월 동로군은 출발했지만, 중국 본토에서 출발한 강남군은 6월 말경 도착하여 연합함대는 이키를 치고 규슈 북부로 진격하고 있었다. 일본은 몽고의 재침에 대비해 경비를 철저히 하고 하카타만 연안에는 상륙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을 쌓았다. 하지만 조그만 세력들로 나뉘어 다투고 있던 일본이었기에 바다 가득히 배를 몰아 쳐들어 온 몽골군대와 정상적으로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7월 말이나 8월 초경 몽고의 제2차 원정대는 또 다시 때마침 불어온 태풍을 맞았다. 다카시마(鷹島)항 근처 바다에 떠 있던 배들은 거의 다 침몰했다. 세계 대륙을 유린한 몽고의 기마군단도 일본의 기상조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4,000 여 군함들 중에 무려 3,800 여 군함이 수장되어 겨우 200 여 군함만 돌아왔다.

천하를 손 안에 넣은 몽고에게 그렇게 무섭고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태풍이었던 것이다. 태풍은 바다를 모르던 몽고에게는 '귀신(鬼神)이 곡(哭)할 바람'이겠지만 침략을 당할 처지에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야만인(野蠻人)들로부터 일본 침략을 지켜 준 '신(神)이 불어 준 바람(風)'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 바람을 '가미가제(神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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