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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열풍과 좀비사무라이의 천 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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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제는 허풍이다

가미가제(神風)는 허풍

이렇듯 다른 국가들이 몽골에 굴복하던 와중에도 일본만이 용감하게 싸워서 몽골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고, 일본은 신국이기 때문에 신의 바람 즉 가미가제가 항상 일본을 지켜준다고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조작하여 일본국민들에게 하나의 사관으로 깊숙이 자리잡도록 조작했지만 ‘가미가제’ 생성 자체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학자들은 원나라의 침공으로부터 일본을 막아준 것은 ‘신의 바람’ 때문이 아니라, 고려민중들의 저항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교수는 그의 저서 '조선사'에서 삼별초 등 고려의 항몽투쟁이 몽고의 일본침략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도 ‘동아시아 속의 한일2천년사(2005년 책과함께)’에서 ‘일본이 몽고의 지배를 받지 않은 이유를 가미가제(神風)의 덕이 아니라 고려 민중의 끈질긴 투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려의 끈질긴 대 몽고 투쟁의 과정과 몽고의 일본 내습에 따른 가미가제의 탄생 과정을 요시노 교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의 저항
몽골 족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1206년 징기즈 칸(成吉思汗)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234년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을 무너뜨리고 중국 북반부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 사이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나아가 러시아를 정복한 뒤, 1241년에는 발슈타트(Wahlstatt) 전투로 유럽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의 건설이 추진되었으며, 온 세계가 몽골의 정복활동에 농락됐다.

몽골은 금에 대한 공격과 병행해 이미 1231년부터 고려를 침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몽골의 공격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1259년까지 실로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 사이, 몽골은 여섯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잇따라 공격했고, 고려는 전국토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1254년 다섯 번째 몽골이 침입했을 때는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포로는 2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도처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기록돼 있다.

당시 고려는 1170년 이후 무신정권 시대였으며, 1196년 무신 가운데 한 사람인 최충헌(崔忠獻)이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 4대에 걸쳐 최씨정권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씨정권은 대몽고 항쟁 방침을 세우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한강 하구에 있는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해협이 요새를 이루고 있어 해전에 서투른 몽골에 쉽게 공략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고려는 16년간이나 걸려서 대장경을 간행했으며, 그때 간행된 판목 8만 매가 지금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보존돼 있다. 이렇듯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를 거점으로 삼아 30여 년간 대몽골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국토가 갈수록 황폐해졌다. 1258년 쿠데타로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결국 태자 전( )을 원나라에 파견해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때 몽골에서는 쿠빌라이가 즉위해 있었다. 쿠빌라이(사진)는 태자 전을 고려 국왕에 책봉하고, 호위까지 해주면서 귀국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장기간에 걸친 항전이 종식되기에 이르렀다. 고려가 항복하자 비로소 몽골은 일본 침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일본의 30여 년간의 여유는 고려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던 것이다.

2. 삼별초의 항쟁
1266년 원나라 최초의 사자는 일본으로 향했지만 대한해협의 거친 파도를 만나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 국왕에게 일본에 사자를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1268년 “대몽골국 황제가 서(書)를 일본 국왕에게 보낸다”로 시작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것을 어찌 좋아하겠는가?”로 끝맺은 쿠빌라이의 조서를 지닌 사자가 일본에 도착하였다. 다자이후(太宰府)에게서 보고를 받은 막부는 정국이 혼란스럽게 돌아갔지만 고려의 사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해버렸다. 이후 거의 해마다 파견된 사자에게 일본이 답변을 해주지 않자 사태는 더욱더 긴박하게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이미 1268년 ‘남송이든 일본이든, 명령을 거스르면 정토(征討)한다”고 하면서 고려에 징병과 군함 건조를 명했으며, 1270년에는 일본 원정 계획을 세우고 고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일본 원정은 127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행에 옮기게 된다. 최초의 사자가 일본에 건너갔던 때부터 따져보면 6년. 일본의 처지에서 이 6년은 그야말로 이국경고번역(異國警固番役: 치쿠젠(筑前)•히젠(肥前) 兩國 연안의 요충을 규슈 諸國의 地頭•御家人(일종의 영주 또는 장군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에게 윤번으로 수비케 하는 것)제도를 정비하는 등 방비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기간이었다.

그리고 공백이 생겼던 것은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에도 김인준(金仁俊).임연(林衍) 등 무신정권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왕실은 강화도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1270년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쓰러져 무신정권이 완전히 종말을 고한 뒤에야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러한 결정에 반대해 끝까지 몽골에 저항한 조직이 있었는데, 바로 삼별초(三別抄) 부대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정권의 2代 집권자 최우(崔瑀)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병력수가 많아짐에 따라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뉘었는데, 몽골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귀환병(歸還兵)들이 신의군(神義軍)으로 조직됨으로써 이 세 부대를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삼별초는 육번도방(六番都房)과 함께 최씨정권의 군사적 지주 역할을 함으로써 사병(私兵)집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이후 정규군으로 조직 개편 되었다. 삼별초는 30년간 몽골과 전쟁을 치렀던 핵심 부대였다.

한편 개경 천도는 원에 완전히 굴복하는 뜻이라며, 배중손(裵仲孫)은 1천 척의 병선을 이끌고 강화를 탈출했다. 『몽골병이 대거 내도(來到)하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구정(毬庭: 격구장)에 모여라』 위의 인용문은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43에 기록된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의 말이다. 그는 ‘반몽구국(反蒙救國)’을 외치면서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을 추대해 정통 정부를 자칭한 뒤, 진도에 본거지를 두고 전라도 일대를 제압했다. 나아가 경상도에까지 진출했고,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해 이에 합류했다.

몽골은 일본 원정을 위해서는 고려의 남부 지방을 출격 거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됐다. 군사와 군량 징발, 군함 건조 등을 위해 곡창 지대인 이 지역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삼별초를 진압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일본 원정은 그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1271년 원군의 총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는 또 다시 제주도로 이동해 저항을 계속했다. 삼별초의 대몽 항전이 완전히 진압된 때는 1273년 4월이다. 몽고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는 그들이 벌인 전투 사상 가장 기나긴 전투를 했던 국가였던 것이다.

그 해 6월 몽골군은 정식으로 일본 출병이 결정됐다. 3년여에 걸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뒤에야 비로소 일본 공격이 가능해졌으며, 이 기간에 일본은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삼별초가 진압된 다음해인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 마침내 실행에 옮겨졌다. 일본에서는 이를 ‘분에이노에키(文永의 役)’라 한다. 고려에 명해서 건조된 900척의 군함에 고려에서 징병한 병사를 합친 3만 수천 명이 나눠 타고, 쓰시마.이키(壹岐)를 공격한 다음 하카타(博多)만에 이르렀으며, 10월 20일 새벽 상륙을 시작했다. 집단전범과 화약 등으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다자이후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밤이 되자 몽골군은 배로 철수해버렸다. 때마침 그날 밤 폭풍우가 몰아쳐서 수많은 배가 침몰했고, 몽골군은 그대로 퇴각해 버렸다.

3. 아시아 각지의 반원 투쟁
몽골은 제1차 일본 원정에는 실패했지만 가장 주요한 당면 목표인 남송 공략을 추진했다. 결국 1279년 송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자 곧바로 두 번째 일본 원정 준비에 착수했으며, 마침내 1281년 제2차 원정 에 나섰다. 일본에서는 이를 ‘코안노에커(弘安의 役)’이라고 한다. 고려를 출격 거점으로 한 동로군(東路軍) 4만 명과 새로 지배 아래에 들어온 남송에서 징발한 강남군(江南軍) 10만 명을 두 갈래로 나눈 대군세가 일본을 항해 떠났다. 6월 초순 하카타만에 도착한 동로군은 일주인간 전투를 벌였지만 본토에는 상륙하지 못했고,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7월 말에 이마리(伊万里)만 입구인 다카시마(鷹島)를 점령해 상륙하려고 했지만 또 다시 태풍을 만나 괴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원정에 대한 몽골의 의욕은 1,2차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몽골군의 잇따른 침략으로 인해 여전히 긴장과 공포 속에서 지냈는데, 사실 쿠빌라이는 제3차 원정도 고려하고 있었다.

남송 정복 후 쿠빌라이는 “일본 및 교지(交趾 북베트남)를 정벌할 전선(戰船)”을 건조하라고 명령했으며, 실제로 일본 원정과 병행해 1280년 미얀마의 파간 왕조를 공격했고, 베트남에 대한 압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 원정에 실패한 뒤, 1282년에는 참파(중국어 지명은 林邑로 베트남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인도네시아계인 참족(族)이 세운 나라)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으나 저항에 부딪힌 데다 태풍 피해까지 겹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1284년 또다시 참파 원정을 떠났고, 이에 대해 참파 왕은 주변 각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베트남은 원군을 보내라는 몽골의 명령을 거부하고 참파를 지원했으며, 캄보디아 역시 몽골의 요청을 거절했다. 몽골군은 1285년 초 베트남을 공격해 하노이를 점령했으나 3개월 뒤 철수한다.

이처럼 몽골의 동남아시아 공략은 각지의 저항에 부딪혀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부담을 강제로 떠맡았던 중국 남부 각지의 농민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 지배층 내부에 동방 3왕가(王家)의 난이 일어나자, 쿠빌라이는 1286년 결국 일본 원정 계획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사(元史>에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강절(江浙) 군민의 환성이 우레와 같았다”고 쓰여 있다.

일본이 제3차 원정을 모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아시아 각지의 반몽골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1287년 몽골군은 베트남에 패배해 타격을 입었고, 다음해에는 베트남에서 철퇴했다. 쿠빌라이는 1292년 일본 원정 계획을 다시 수립했지만, 같은 해에 시작한 자바 원정이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일본 공격을 단행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제3차 일본 원정 계획을 흐지부지돼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몽골 침공에 대항해 오직 일본만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아니며, ‘가미가제’가 일본에만 불어던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일본이 특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동아시아 각지 특히 고려에서 일어나 전투의 덕을 본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함들은 재활용 목재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고려의 대항몽 전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2차례에 걸친 일본에 대한 원나라의 내습에 사용되었던 군함들이 폭풍에 괴멸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삼별초의 항쟁을 끝으로 몽골의 명에 의거 고려는 군함을 만들었지만 6차례에 걸친 항몽 투쟁에서 온 국토가 피폐해져 튼튼한 군함을 만들 수 있는 자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즉 ‘재활용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너무 허약해 폭풍에 궤멸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텍사스 A&M 대학의 고고학자 랜들 사사키(LANDALL J.SASAKI) 교수에 의거 사실적으로 밝혀졌다. 

▲다카시마박물관에 전장 40미터로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는 여몽연합 함대

사사키 교수는 2003년 다카시마(Takashima)항에서 몽고의 2차 침공 당시 선박 잔해를 굴착하여 연구한 보고서를 주간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에 실었다. 보고서에서 사사키 교수는 몽골 함대가 궤멸한 것은 군함들이 원거리 항해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며 목재도 헌것을 다시 쓰는 등 매우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사키 교수는 2차 침공 당시 선박 잔해 700점을 조사한 결과 길이 3m가 넘는 것이 단 한 개도 없고 대부분은 10㎝에서 1m 정도였으며, 약 500점의 잔해에서 못이 촘촘히 박혀 있어 한자리에 대여섯 개씩 박힌 것도 있었다고 밝혔다. 사사키 교수는 “잔해가 작고 못이 많이 박혀 있는 것은 헌 목재를 재활용해 만든 허술한 배였음을 뜻한다”고 말하면서 ‘일부 목재는 원래 재질이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 되살아 난 기적신화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성하지 못하는 비판의식 없는 전후 일본에는 또다시 기적 신화는 되살아 나고 있는 실정이다.

전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일왕제 폐지를 검토하였으나 비열한 일왕과의 뒤거래로 미국은 일본국민들의 강력한 저항할 우려된다는 구실로 일왕제만은 폐지하지 않았다. 일왕도 전쟁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실권이 없는 상징 일왕제로 대신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히로히토을 처벌하는 대신 동경재판에서 전범들을 처형, 처벌함으로써 일왕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다.

어째든 이 조치로 인하여 상징적이든 실질적이든 일왕의 일본지배는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이 함께 영원하다)’하다는 ‘기기’의 예언이 무너지지 않게 된 셈이다. 즉 일본 땅에는 다시 기적이 일어나 히로히토 일왕이 무사히 난국을 극복하게 되었고 만세일계라고 불리는 일왕가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결국 멸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왕 히로히토는 63년 간 ‘살아있는 신(現人神 아라히토 가미)’으로 존재했던 잔혹한 특A급 전범자이자 교활한 기회주의자였으며 비열한 3류 사무라이다. 히로히토는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 세계대전 3대 악당 중 한 사람이다. 히로히토는 살아있는 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본 육해공군의 대원수를 겸임했다. “일본에서 일왕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 국민 누구도 일왕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도조가 증언했듯이 히로히토는 모든 전쟁과 참혹한 학살의 최정점에 항상 있었다.

히로히토는 수십 가지의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살아있는 인간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실험한 731부대 일명 “악마의 소굴”을 만들었다. 패망 후에는 학살을 담보로 얻은 731부대의 연구물을 기소를 면하기 위하여 미국에 넘겨주는 추악한 거래를 묵인한 자이다. 꽃다운 10대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위안부)로 만들어 영혼을 빼앗도록 지시했다. 가이덴과 가미가제를 통하여 참혹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지시했다. 포츠담선언에 대하여 즉각적인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일본에 핵폭탄이 터지도록 유도하여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으며, 아시아인 2000만 명, 일본인 300만여 명, 미•영 등 연합군 약6만 명의 희생을 강요한 장본인이자, 전세계를 피의 광풍으로 몰아넣은 학살과 피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기적 신앙을 믿는 일본은 이렇게 비굴한 삶을 살다간 일왕 히로히토를 기리기 위하여 2004년 도쿄 다치가와(立川)시에 있는 쇼와(昭和)기념공원 내에 ‘쇼와일왕 기념관’을 건립했다. 또 현재 식목의 날인 4월 29일을 ‘쇼와의 날’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켜 과거 세계를 피로 물들게 했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있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을 통해 “4월 29일을 ‘격동의 쇼와’를 가슴에 새기는 날로 삼자”고 얼빠진 주장을 했다.(쇼와:히로히토 재임기간의 연호)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존재로 믿고 있다. "히로히토의 성단(聖斷)에 힘입어 평화가 정착되었고, 일본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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