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접속 회원가입
아이디 / 비밀번호찾기 

 일본어의 비밀

 메이지 유신의 실체

 역사조작 실태

 야스쿠니 신사

 독도

 동해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동대학살

 코무덤

 위안부(성노예)

 우키시마호 대폭침

 창씨개명

 일한병합(일한병탄)

 가미가제(神風)의 실체

 역대 제왕(諸王) 현황

 

◎공 지 사 항◎

※ 나르샤학당

※ 한류열풍과 좀비사무라이의 천 년 비밀

[more]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목차 바로가기>> 

전범들을 영웅으로 조작하는 일본

A급 전범들 부활하다
A급 전범들을 처단할 당시 이들의 유골은 외부 유출이 일절 금지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군정이 끝난 53년 5월 유골 일부가 이즈(伊豆)의 산속에 묻혀있으며, 일부는 도조 미망인에게 넘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의 변호인 三文字正平 변호사가 화장장 인부들을 시켜 유골의 일부를 빼돌려 숨겨두었다가 이즈온천 부근 흥아(興亞) 관음상 밑에 안장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55년 4월 일본 후생성은 이 유골을 발굴해 유족들에게 인도했다.

60년 8월에는 우익 인사들이 전범 육군대장 마쯔이 이와네(松井石根)의 고향인 아이치(愛知)현 미가와(三河) 국립공원 경내에 분골을 안치하고 ‘순국7사묘(殉國七士廟)’를 만들어 성역화를 서둘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일곱 전범을 추도하는 것은 일본 국민의 정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어 제막식은 몰래 치러졌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에 일곱 전범의 혼령이 합사된 뒤로는 분위기가 급 반전되기 시작했다.

한편 7명이 사형 집행된 그 이튿날 스가모 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던 나머지 A급 전범 용의자들은 전원 석방됐다. 예정됐던 2차.3차 공판도 열리지 않고 재판은 서둘러 마무리됐다. 그 뒤 풀려난 전범들은 자민당을 창당하여 정치계 보수우익 세력을 형성했다.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57년 총리직까지 오르는 등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16명도 형을 면제 받고 정계와 관계로 속속 진출했다.

이처럼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이 미국의 철저한 '푸들'을 자처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과거 단절이 아니라 과거 인멸로 끝나게 되는 ‘미완의 재판’ 이라는 전리품을 얻게 된다. 일본은 패전을 통해 어떤 변화와 단절도 이뤄내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몽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극동정세의 급변으로 일본이 미소의 동서냉전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을 한 축으로 삼았다. 미국은 일본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한편으로 진용을 재편하면서 일본을 전범국으로서의 도덕적, 정치적, 외교적인 책임을 유화적으로 우회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 청산을 하는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일본에 대하여 사실상 전쟁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되었다.

한편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신 시절인 41년1월 “살아서 포로가 되어 욕(辱)을 당하지 말지어다”라는 '전진훈(戰陣訓)'을 만들어 숱한 자국민을 스스로 떼죽음을 택하도록 몰아넣은 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패전 후 죽음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재판정에서 일왕의 전쟁 책임론을 번복하는 등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 비굴한 사무라이였다. 그런 그가 교수대 이슬로 사라진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쟁영웅으로 화려하게 날개 짓하고 있다.

그가 일왕의 전쟁책임론을 번복하여 일왕을 지킨 것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이던가? 98년 5월 그를 주인공으로 한 '프라이드' 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에서 전범 재판은 승자가 패자를 일방적으로 심판한 불공정하고 부당한 재판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아울러 조작된 전범들의 충성심을 집중 조명하여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켰었다. 이러한 것들은 일본인들에게 비굴한 역사를 보상 받으려는 심리를 자극했으며 편향된 우익사상을 부채질했다. 이에 고무된 도조의 손녀는 할아버지의 비열함을 영웅으로 조작하여 강연에 몰두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난징대학살을 다룬 중국.홍콩 합작 영화 ‘난징 1937’은 우익의 방해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독일 나치 전범들은 대부분 죄에 대한 선고를 받고 사라졌거나, 숨어서 수치스럽게 살아갔다. 그러나 일본은 전범들이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고, 호사스럽게 살아간다면 어떻게 이런 나라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2005년 6월 25일 야스쿠니에서는 또 다른 역사조작 사건이 있었다. 도쿄재판 당시 11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낸 라다비노드 펄 인도판사. 펄 판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을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리고 야스쿠니는 이 곳에 모아놓은 전범들을 “쇼와시대의 순교자”라고 칭송하면서, 이들은 “연합군의 사기 재판에서 전범으로 몰려 잔인하고 부당하게 판결 받았다”, “일본현대사의 진실이 이제야 복원됐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바라보는 일본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또 다른 증거로 삼을 것이다.

 

전범들을 전쟁영웅으로 조작하는 일본
최근 일본에서는 극우 지향과 아시아 침략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미화한 소재의 내용은 무엇이든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또 그러한 장소에는 보통시민들이 들쥐 떼와 같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 2000년 8월 4일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호국신사에서는 일본이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의 아들이며 18년 간 참의원을 지낸 이타가키 마사루가 참석한 가운데 ‘대동아 성전대비(大東亞 聖戰大碑)’ 위령비 제막 행사가 있었다. 이 위령비는 아시아침략전쟁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본 유족회 등 모금운동을 거쳐 만들어진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위령비로써 아시아 침략전쟁을 대동아성전제로 미화한 행사였다.
(대동아전쟁은 민족해방운동으로 민족 '황화 운동(아시아 각 민족을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킨다는 뜻)'과 같은 뜻이다. 대동아권 각 민족은 천손민족에 위한 황화가 실현될 때 비로소 인류로써 생존하는 영광과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 즉 '대동아 황도낙원'을 출현시켜야 한다. 이 대동아 황도낙원의 출현이야말로 민족황황운동의 최종목적이요, 민족해방운동의 수확이다. 따라서 대동아 전쟁의 목적인 것이다.--- 구와바라(桑原玉市)의 저서 [大東亞皇化의 理念]이라는 책에서)

또 역사조작으로 점철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핵심 3인방이자 ‘위안부가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 대출세 역사’ 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한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전쟁론’이란 만화로 일본에서 일약 베스트 작가로 발돋움 했다. 만화의 내용은 일제의 과거사를 철저히 미화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방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미 개전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아시아를 구미로부터 해방시켰다. 또한 한국 병합은 한국이 원하고 세계가 승인한 합법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승리는 동남아시아 사람들, 나아가서는 인도인들에게도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웠다. 전쟁 당시 아시아인들이 일제히 일본을 응원했다”고 말하고 있다.

1974년 2월 일본열도에는 아시아침략전쟁 패잔병 오노다로 인하여 열병을 앓았다.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는 1944년 12월 일본 육군 소위로 필리핀 루방섬에 파견된다. 임무는 미군 비행장 활주로 파괴와 유격전이었다. 45년 3월 루방섬의 일본군이 미군에게 패하자 22세의 오노다는 시마다 쇼이치(島田壓一) 하사, 고즈카 가나시치(小塚金七) 일병과 산으로 도망가 숨어버렸다. 54년엔 시마다가, 65년엔 고즈카가 사망했지만 오노다는 자칭 '나홀로 전투'인 도피 생활을 그래도 계속했다고 한다. 그 사이 오노다의 형제가 여러 번 그를 찾았고, 일본 정부도 수색대를 보냈다. "너는 용감했다. 추하게 포로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을 어머니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자, 이제 생각을 달리해라. 조국은 너희들의 충군애국(忠軍愛國)을 칭찬하고 빨리 돌아오기를 두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라며 일본이 미국에 패전했다는 전단도 뿌렸으며 오노다 스스로도 패전을 알리는 전단도 봤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미군과의 전쟁을 계속 수행한다. 돌아갈 수 없다"라며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오노다는 74년 2월 23일 직속상관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에게서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정글을 나왔다고 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투항명령서 전달식, 마르코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항복 신고, 부동의 자세, 녹슬지 않은 총검 등을 통하여 일본 국민들과 매스컴들은 패잔병 오노다의 군인정신을 배우자며 열광했다. 여기에서 일본은 추악한 침략과 살인에 대한 반성은 온데 간데 없고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오노다를 통해 분출했던 것이다. 소위 일본군인 즉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산속으로 도망친 자에 대하여 말이다.

그리고 2005년 5월에도 일본열도에는 군국주의 향수에 대한 일진 광풍이 불었다.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당시의 일본군 2명이 필리핀 만다나오섬 산악지대에 패전 사실을 모른 채 60년간 생존해 있다고 제보한 필리핀 여성에 의거 시작되었다.

이 사실에 고이즈미 총리는 “아니 그럴 수가 ….”라며 흥분하여 일본 외무성.후생노동성 직원들과 무려 100여명의 기자들이 필리핀 현지에 급파되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때 일본 극우매체인 산케이는  “2명은 옛 일본군 육군 30사단 30연대 3중대 중대장 야마카와 요시오(山川吉雄 87)중위와 나카우치 스즈키(中內續喜 83)상병”이라고 구체적으로 전했다. 또 다른 언론들은 “2명은 전쟁은 끝난 뒤 현지 산악게릴라 부대에 들어가 전술 등을 가르쳐왔다”, “현지 당국이 보호, 귀국희망”,”기적의 생환” 등 옛 일본군 패잔병을 미화하면서 금방이라도 일본으로 돌아올 것같이 앞다퉈 대서 특필했다.

이러한 광풍에 대하여 2005년 5월 28일자 영국의 더 타임즈는 “기적이 이뤄질지, 엄청난 날조가 될지는 좀더 지켜 볼 필요가 있다”라고 비꼬았다. 결국 이 사태는 타임즈의 말대로 일본군국주의 향수가 만들어낸 "희대의 조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2005년 4월 7일은 일본이 아시아침략전쟁 패망 당시 전함 야마토(大和)가 격침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야마토함은 진주만 기습 8일 후인 1941년 12월 16일 완성됐다. 배수량 7만2809t, 전장 263m, 최고 속도 27노트. 여기에 사정거리 42㎞에 이르는 460mm짜리 주포 9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배수량으로나 주포 크기로나 당시 세계 최대였고, 많은 첨단 기자재가 탑재돼 기술적으로도 최첨단을 자랑하던 전함이었다. 일본의 기술력이 총 집결된 '대함거포(大艦巨砲)' 주의에 충실한 전함이었다.

하지만 야마토는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진 못했다. 야마토는 패망을 앞두고 '1억 총 옥쇄(玉碎)'의 모범을 보이자며 편도 분 연료만 넣고 최대 격전지인 오키나와(沖繩)로 출정했다. 야마토호는 결국 미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격침됐다. 3300여 명의 승무원 중 생존자는 단276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언론들은 이를 기념해 영웅적으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뜻인 '산화(散華)'로 표현하면서 야마토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야마토함이 건조됐던 히로시마(廣島)현의 구레(吳)항에는 실물크기 10분의 1 모형의 야마토함을 전시하는 등 야마토박물관을 개관했다. 이런 붐을 타고 '사나이들의 야마토'라는 영화도 제작되었다. 이는 광기 어린 군국주의의 말로를 교묘하게 영웅 전설로 과대 포장하여 형이하학적인 일본인들의 피를 뜨겁게 만들어 애국심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시각은 아시아 침략전쟁은 범죄가 아니며,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범이 아니라 전쟁 영웅이라는 것이다.

일본정부 각료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강력히 반대하고, 일본국내 양심적인 학자들도 이러한 행위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규정한 헌법에 위반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참배중단 및 A급 전범 분사(分祀) 요구도 거절하고 있다. 우매한 국민들에게 선과 악을 구분시키고 평화에 대한 가치관을 주지시켜야 하는 신사측도 “(도쿄 재판에 대해)국제법의 관점에서 보면 강한 이론이 남아 있으며 일본인들은 이들을 전범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을 분리해서 모시는 일을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한 전몰자는 영령이 되므로, 신도의 관례로서 레이지보(靈爾簿:전몰자 명부)의 기재 말소는 할 수 없다. 물론 불교도나 기독교인 등이 이의를 제기해도 수용할 수 없다. 이는 국회에서 결정된 전몰자 유족에 대한 원호에 따라, 합사(合祀)를 추진해 왔기 때문”이라고 거절하고 있다.

A급 전범들은 주변국들은 물론이고 일본 내에서도 엄청난 물.인적 피해를 초래한 장본인들로서 인류사의 공적(公敵)이다. 때문에 일본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고이즈미를 필두로 하는 일본 우익 인사들은 우리는 우리식대로 나아간다며 안하무인 격이다.

2005년 5월 집권 자민당의 중의원 의원으로 ’일본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과 역사조작 교과서를 만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지부장 등을 맡은 모리오카 마사히로(森岡正宏) 후생노동성 정무관은  “중국을 걱정해 일본은 A급 전범이 곧 나쁜 존재인 것으로 처리해왔다. A급 전범은 일본 국내에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도쿄 전범재판은 이긴 쪽이 정의이고 진 쪽이 악(惡)이라고 할 수 없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자,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신사 참배 중단 요구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 대해 “트집잡기”라고 비꼬았다. 이어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전 정조회장은 A급 전범을 분사하라는 촉구에 대해 “영령을 분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우리들이 혼을 팔아 형식적인 참배를 한들 영령이 기뻐할 리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작태는 일본이 글로벌시대에 미래지향적 선린우호 관계를 버리고 피의 광풍을 부르는 과거지향적 전쟁시대로 가겠다는 것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사태다.



일본은 아직도 피에 목 말라 하고 있다
일본과 똑같이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전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독일정부는 지금도 변함없이 전범자에 대하여 시효 없이 단죄하고 우익의 준동을 막기 위하여 법으로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주변국과 교과서를 협의하여 2세들의 교육에 앞장서며 전쟁배상에 대하여 지구 반대편 아시아까지 찾아 나서고 있다. 여기에는 “살인 행위를 팔짱 낀 채 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죄” 라고 외친 철학자 칼 야스퍼스나 ‘양철북’의 저자 퀀터 그라스와 같은 양심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독일의 미래지향적 노력은 유럽에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승패의 분수령이 됐던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 독일총리가 처음으로 초청됐다. 게르하르트 슈뢰더(Schroeder) 독일총리도 2004년 6월 6일 열린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아름다운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영국과 독일 관계가 전후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로 발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처사는 너무나도 동 떨어져 있다. 일본인으로 전쟁에 동원됐던 한국을 비롯한 과거 식민지 사람들의 피해보상에 대해서는 '국적조항'을 들먹이며 보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수상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역사학자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전 이바라키대학 교수는 '평화헌법' 제20조를 근거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국민을‘일왕의 군대’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 ‘군국 신사’였고, 일왕제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한 강력한 수단이었다. 국가의 대표가 공식 참배를 하게 된다면 일본 국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책임과 전쟁 범죄를 스스로 공식적으로 면죄했다는 비난을 전세계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관련 시민단체들은 "세계의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이며 “한일 과거사의 해결 없이 일본 평화헌법에도 어긋나는 신사참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220만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들의 인권을 짓밟는 처사"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역사치매에 걸린 보수우익들은 수천만 명의 존귀한 인명을 앗아간 흡혈귀와 같은 A급 전범들을 천사와 신으로 변질시켜 야스쿠니신사에 갖다 놓고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참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아시아침략 전쟁 패전 후 미완의 재판에서 비롯된 이들의 준동은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우매한 국민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무릇 이웃이란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도란도란 아름다운 전설을 이야기하고 편해야 한다. 시계를 꺼꾸로 돌려놓는 이러한 자들의 준동은 전쟁터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소름 끼치는 상황.부상과 이산의 확실성.죽음의 광기 등 끔찍한 모든 가능성이라는 먹구름이 우리와 너무나도 가까이 와 있다. 이러한 일본과 같이 산다는 것은 세계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전 일본수상이 이곳에 참배를 했던 것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50년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60년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80년대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90년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모리 요시노리(森喜朗),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에 이르기까지 총리만 되었다 하면 어김없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만약 총리라는 사람이 이곳에 참배를 하지 않는다면 수백만 전쟁 유가족 및 정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극우 인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도 망언제조기 이시하라나 막가파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의 고집은 보수우익 세력을 집합시켜 여당의 입지강화를 위한 정치적 계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지금의 보수우익의 세력이 너무나 강대해졌다는 것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군마(群馬)현 마에바시(前橋)에서 열린 한 전몰자 추도식에서 행한 인사말에서 “야스쿠니는 일본의 역사적, 정신적 상징”이라고 밝혔듯이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는 이미 종교적 차원을 넘어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도자가 지닌 정치적.역사적 신념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 뿐만 아니라 전쟁을 부르는 주술적 장소로 변질되었다.

2005년 4월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군국주의 침략에 책임 있는 A급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들에게 참배한다면 참배의 의도가 어떻든 독일과 정반대다. 따라서 철저히 나치를 단죄한 독일 방식이 휼륭했다면 그에 비해 일본의 그것은 매우 하수"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차기 일본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 A급 전법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이자 '일본이 소형 원자폭탄 보유는 문제될 게 없다'라고 폭탄발언을 한 아베 신조(安倍晋三)자민당 간사장은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공언을 한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여야 하는가?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미완의 재판은 아시아 침략 전쟁을 단절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보수우익 세력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야스쿠니신사와 보수우익간의 밀착 관계는 치밀하고도 장기적으로 피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시하라, 고이즈미 대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일본 국민들의 80%가 넘나드는 지지를 받고 있다. 이는 상대를 허용하지 않는 토네이토급으로 변해버렸다. 또한 이러한 지지도는 일본인들의 속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이중성에 비춰볼 때 대리 만족의 수준을 넘어서 이미 위험 수준을 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어 참배가 곤란하므로 이들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분사(分祀)론, 정교분리 원칙을 걱정할 필요 없이 특수법인으로 바꾸자는 안, 야스쿠니신사 맞은 편에 무명용사 영령을 위로하는 지도리카부치(千鳥ヶ淵戰沒者墓苑)라는 묘역이 있으므로 이곳을 참배해도 충분하다는 의견, 외국 원수가 마음 편히 헌화할 수 있는 국립묘지를 별도로 만들자는 주장 등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어느것 하나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야스쿠니신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이는 야스쿠니신사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동일선상에 놓아 군국주의 부활과 아시아침략전쟁 당시 모자라는 피를 보충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