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접속 회원가입
아이디 / 비밀번호찾기 

 일본어의 비밀

 메이지 유신의 실체

 역사조작 실태

 야스쿠니 신사

 독도

 동해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동대학살

 코무덤

 위안부(성노예)

 우키시마호 대폭침

 창씨개명

 일한병합(일한병탄)

 가미가제(神風)의 실체

 역대 제왕(諸王) 현황

 

◎공 지 사 항◎

※ 나르샤학당

※ 한류열풍과 좀비사무라이의 천 년 비밀

[more]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목차 바로가기>> 

화폐로 바라 본 일본

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전 유명한 일화 한 토막. 그는 1971년 현대조선소 설립 자금을 빌리기 위하여 영국으로 갔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써 국제적 신뢰가 지금같이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영국 은행은 "뭘 믿고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느냐"며 냉담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당시 사용하던 500원짜리 한국 지폐 한 장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줬다. "자. 이 지폐에 그려진 그림은 철로 만든 거북선이요. 철갑선은 한국이 세계최초이며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만들었소." 정 회장은 이 말 한마디로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선박도 수주하였다.

화폐는 그 나라의 얼굴로 통한다. 화폐 도안 소재로써는 보통 인물과 자연 풍경, 상징물 중 하나가 선택된다. 그 때문에 돈에 새겨진 도안은 그 나라의 역사.문화.풍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화폐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인물이다.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국가의 발전과 생성에 크게 기여했거나, 높은 단계의 철학으로 국민들을 살찌우게 한 인물들이다. 미국은 예외 없이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과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화폐만 보더라도 1만원 권에는 세종대왕, 5천원 권에는 율곡 이 이, 1천원 권에는 퇴계 이 황, 100원권에는 이순신장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백성들의 가르침에 앞장서서 한글을 창제했거나, 학문과 평화를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한줌의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화폐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일본화폐에 그려져 있는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만엔 권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 5천엔 권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1862~1933), 1천엔 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 등은 메이지 시절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학살과 침략 등 저주의 굿판을 벌이도록 독려했던 자들이다. 그리고 국민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인도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대표적인 자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1만엔 권에는 쇼토쿠(聖德)태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쇼토쿠는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를 스승으로 모셨고, 일본최초로 율령체제를 만들었다는 7세기 초 일본왕실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백제계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있자 80년대 일본정부는 후쿠자와로 슬쩍 대체시켰다.

후쿠자와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만엔 권에 등장할 정도라면 과연 그는 일본에서 어떤 인물인가?

후쿠자와는 메이지 시절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게이오대학의 전신)을 설립하고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했다. 그리고 1872년 '학문의 권장 <學問のすすめ>’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7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인구가 3천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일본에서 ‘일본의 정신적 지주’, ‘일본의 볼테르’, ‘근대일본의 계몽사상가’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는 '전국 인민들의 뇌리 속에 국가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자’라고 주장하여 일본열도에 개인의 인권을 완전히 몰살하는 국가지상주의가 탄생토록 독려했다. 이것은 평화철학이나 도덕적으로 전혀 무장되어 있지 않은 3류 사무라이들에게 정권 찬탈에 대한 이론적 도피처를 제공했다. 즉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침략과 학살에 대한 환상을 주입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일본인 특유의 카멜레온적 2중 플레이, 즉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을 완벽하게 숨기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무서운 일본국민성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고, 오늘날 일본 우익의 태두이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자이다.

당시 후쿠자와는 ‘서양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내세운 기독교 국가이지만 본질은 타국을 침략하려고 노리는 살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열도에 국가지상주의에 반대되는 인본주의 철학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도입한 유교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인의 의무는 오직 이 코쿠타이(國體)를 유지시키는데 있다. 코쿠타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국의 정권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의 지력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많은 방책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지력발생에 있어서 가장 급하고 필수적인 것은 옛날의 습관에 빠져 있는 악습을 일소하고, 서양의 문명 정신을 채택하는 일이다. 음양오행의 악습을 일소하지 않으면 궁리의 길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은 그가 얼마나 유교를 문명의 적으로 간주했는지 잘 대변하고 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장려했던 유교의 높은 정신세계를 매장시켜, 그 결과로써 평화적인 도덕관념을 마비시키고 일제가 침략 지상주의로 치닫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또 후쿠자와는 유길준.김옥균 등 조선의 급진개화파와 교류를 하면서 이들을 뒤에서 조종내지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1885년 지지신보에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그 유명한 ‘탈아론(脫亞論)’을 썼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하고, 지나(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서양사람들의 방식대로’가 뜻하는 것은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살해하면서 동물로 착각하여 죽였다라고 변명했듯이 점령지의 사람들을 동물과 같이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한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 라고 비하한 것은 수천 년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들을 말한다. 후쿠자와는 여기에서 일본인들에게 몸은 비록 동양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서양인이 되어 일본은 아시아에서 탈피하여 서구와 진퇴를 같이하라고 주창한 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철학이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을 더욱 광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조작 쓰레기장의 개(犬)인 이중인격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1885년에는 ‘일왕께서 직접 징벌 나가실 준비는 되었는가?’,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아직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 ‘일본병사들,재조선 일본인들의 안부는 어떠한가?’,‘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라는 논문을 통해 조선을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 , 즉 ‘야만 이하의 나라’ 라고 혹평하며 조선을 맹렬히 침공하도록 선동한 자이다. 그리고 1895년 간악한 일제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하는 사건이 터지자 세계의 비난 여론을 앞장서서 무마한 자이다. 그러면서 그의 많은 제자들을 한반도 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독려했다.

또 그는 1894년 일제가 풍도 앞바다에 있는 청나라 함대를 비겁하게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4일 지지신보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통해 청일전쟁을 ‘문명의 선전’이라고 하면서 전쟁을 선동한 주전론자(主戰論者)다.
"문명류(文明流)의 개혁을 기뻐하지 않는 태도는 미개인의 일상사로서 완고한 백성을 지도해 문명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데에는 병력으로써 임하는 방법 이외는 달리 좋은 것이 없다."

1894년 8월5일자 사설에서는 "이번의 전쟁은 일본이 조선에 문명류의 개혁을 촉구하고, 자립과 스스로 교제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데, 저 지나인(중국인)은 문명류주의에 반대해 종종 방해할 뿐 아니라 병력을 동원해 우리에게 반항할 뜻을 표하고, 더군다나 그로부터 실마리를 풀려고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주창들은 서양을 추종하되 평화철학이 깃든 기독교를 멀리하여 비정.잔혹한 침략과 억압하는 기술만 배우고 습득해서 하루 빨리 구미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쿠자와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을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됐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일본인들이 인간 도살자가 되어 한반도.중국 등 여러 아시아국가들을 피의 광풍으로 휘몰아 넣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늘날 일본은 이렇듯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전쟁과 학살을 독려한 후쿠자와를 계몽사상가라 칭송하면서 1만엔 지폐에까지 등장시켰다. 일본열도에는 그렇게도 화폐에 넣을 인재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가재는 게 편이라 오늘날 일본인들의 편향된 시각을 반영한 것인가?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칼로 억압하여 심어놓은 비판의식 없는 일본 국민성의 대변인가? 참으로 한심스러운 섬나라 일본이다.

○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5천엔 권의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1862~1933)도 메이지 시대 3류 사무라이의 주구(走狗)로 후쿠자와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1906년 발표한 <말라 죽은 조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조선인의 생활 풍습은 죽은 풍습이 되었다. 그들은 민족으로서의 삶의 기한이 다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국민적인 삶의 진로는 이미 지나버렸다. 죽음은 이미 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폭거적인 한국 병탄에 즈음하여 ‘다음으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조선합방이다.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천재일우의 기회인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일약 독일. 프랑스. 스페인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갖게 된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우리나라는 유럽제국보다 더 대국이 되었다. 여러분은 순식간에 큰 것이다. 한달 전의 일본과 지금의 일본은 천지차이다. 이와 같이 대국이 된 이상 이제 예전부터 내려온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연설한 식민지 예찬론자이자 전쟁을 선동한 자이다.

그리고 1천엔 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제국주의에 오염된 자이다. [만주와 대한제국의 이곳 저곳],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 그의 작품 곳곳에는 이웃나라들을 비하한 글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정로환(正露丸)이라는 약 이름을 러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를 정복한다'라는 의미인 ‘征露丸’으로 바꾸어 사용한 자이다. 또 그는 러시아인을 ‘로스케(露助)’로 중국인을 ‘챤(チヤン)’으로 불렀다. 이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업신여기고 비하하는 말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