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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왕실 秘문서

서지학자 이종학

1993년 8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현해탄에는 엄청난 역사의 파도가 몰아쳤다. 역사의 진실 앞에 일본이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前독도박물관 초대관장을 역임한 서지(書誌)학자 이종학(李鐘學.2002년 11월 작고)씨가 일본왕실의 내각문고에 보관되어 있던 일제의 한국강점 관련 극비(極秘)문서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 부 한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附 韓國倂合과 軍事上의 關係)>를 약90년 만에 발견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일제가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에 일한병합에 대한 그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없어 역사치매에 걸린 일본인들의 망발에 끝없이 시달려야 했으나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발견한 이 문건에 의하여 역사적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건에 의하면 일한병합은 메이지일왕을 비롯한 일본내각에서 치밀하게 계획된 사전 각본에 의거 이루어졌으며, 총칼로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을사늑약이 발생하자 1899년 국제법학자 구라치 데쓰키치(倉地鐵吉)는 [만국공법]에서 조약이 유효성을 가지려면 ‘합의가 완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약 체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폭력,위협 등기 가해졌을 때는 본인의 의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약을 결코 유효하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 1906년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 교수는 [한국의 국제 상황]이라는 저서에서 ‘강압에 따른 조약은 무효’라며 ‘우리들은 망설일 이유도 없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원칙은 1935년 하버드법대 국제법 관련규약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된바 있다. 또한 1965년 채택된‘조약법에 관한 빈(Wien)조약’ 제 51조에는 ‘나라의 대표자에 대한 강제(强制)’ 결과의 조약은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을사늑약과 일한병합은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협박하고, 대신들을 감금한 회담장 주위를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 당연히 그리고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65년 한일협정은 재고되어야 한다.
다음은 이종학씨가 92년부터 97년까지 스파이작전을 방불케하는 과정을 통해 입수하고, 4년간에 걸쳐 번역작업을 마친 3건의 문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작성하여 일본에 보고한 ‘한국병합시말’표지(한국강점자료집 제공)


1)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 부 한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 : 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附 韓國倂合ト軍事上ノ關係> 이하 ‘병합시말’은 1992년 2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하였다. 이는 일본측 전권위임자이자 한국 강탈를 주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한국강점조약을 체결한 2개월 후 1910년 11월7일 내각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한국병합에 대한 그 전말을 보고하고, 일본 메이지왕까지 열람한 문건이다.

2) <한국병합에 관한 서류 발전.착전: 韓國倂合ニ關スル 發電.着電>은 1994년 12월에 발견하였다. 이는 발전 162회, 착전 128회 총 290회 345족의 방대한 분량이며, 통감부와 일본내각 사이에 주고받았던 기밀전문이다. 여기에는 일제가 조약을 체결하면서 저질렀던 수많은 음모와 잔꾀가 담겨있다. ‘대한제국’국호와 ‘황제’칭호를 일제가 자기들 마음대로 이리 저리로 바꾸었으며, 우리측 대신들을 은사금이란 미명 아래 돈으로 매수하는 과정, 반대자에 대한 조치 내용 등 상세한 부분까지도 통감부에서 일본 내각과 의논했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3) 추밀원회의필기 : <樞密院會議筆記>는 1997년에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의 헌법기관으로서 국가적 중요 안건을 의결하는 추밀원에서 병합 당일인 8월 22일 결의 내용을 필기한 문서이다.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한국에서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 등 한국병합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한 형식적인 회의였다. 1시간 5분만에 13건의 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이 3건의 문서 중 ‘병합시말’은 한국강점의 종합보고서라면 ‘발전.착전’은 일일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추밀원회의필기’는 최종결정문이라는 점에서 이 3가지 문건만으로도 한국강점의 실상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이종학씨가 최초로 공개한 1000여 장에 이르는 3건의 일본 비밀공문서을 읽어 보면 일제가 주장하는 대등한 양위가 아니라 강압과 협박에 의해 체결됐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된다.
한편 이종학씨는 이 3건의 秘문서를 북일수교 협상시 한국이 1965년 청산하지 못한 역사청산의 자료로 활용하라는 뜻에서 2000년 2월 일본 조선대학교 사학자 금병동(琴秉洞) 교수에게 전달하였다. 확실한 과거사 청산을 통해 양국관계를 정립하라는 바람에서였다. 그리고 2000년 3월 19일 KBS 1TV 일요스페셜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日왕실 秘문서는 왜 북으로 갔나’를 방송하였으며, 이종학씨는 2000년 5월 사운연구소발행 <한국강점자료집(韓國强占資料集)> 을 발간하였다.


일한병합은 확실하게 무효다
일본은 지금까지 "일한병합은 한국의 자발적 양여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만 넘치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하지만 이종학씨가 발국한 문건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한국을 강탈하기 위하여 얼마나 치밀하고 악랄하게 진행됐는지 알 수 있다.


1) 일제는 앞서 기술했듯이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약 30여년 간 치밀하게 준비하여왔다. 1909년에는 최종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1909년 3월 30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는 ‘각의결정서집록(閣議決定書輯錄)’이 작성되어 총리에 제출되었고, 동년 7월 6일 각의에서 결정되고 같은 날 일왕의 재가를 거쳤다. 첫째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할 것’, 둘째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병합의 방침에 근거하여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거두어 힘써 실력의 부식을 도모할 일’
▲강점의 사전준비 : 좌-1910년 6월 헌병정치의 장본인으로 독립운동을 철저히 진압했던 육군소장 아카시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통감부 경무총장으로 임명하는 문서, 우- 1910년 7월 데라우치의 사위인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를 통감비서관으로 임명하는 문서 (한국강점자료집 제공)

2) 이러한 사실은 데라우치가 가쓰라에게 보고한 ‘병합시말’의 첫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본관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지난 7월 23일 한국에 착임한 이래 이미 확정된 방침에 따라 시기를 노려 병합의 실행에 착수코자 한편으로는 준비를 서두름……”

3) 데라우치는 ‘병합시말’의 부록 ‘군사상의 관계’에서 기록했듯이 부임을 전후하여 한반도의 군대를 해산시켰고, 일부 한국인들을 일본군대에 편입시켰다.그리고 강원도.황해도.압록강.두만강 등 북관(北關) 도문강 연안 일대에는 7월9일까지 군대를 재배치하여 강제병합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진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또 헌병군대를 1,000명 이상 증강했으며, 병합에 임박해서는 군대와 경찰을 완전 무장시켰다.

4) 군대 배치도를 보면 조약 체결 당시 4대문과 경성의 주요 입구에는 20m마다 한 조씩 무장 병력이 배치됐다는 것과 데라우치의 보고서 말미에 “그러나 한편 군대,경찰의 위력과 끊임없는 경비가 간접적으로 다대한 효력을 나타낸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기록은 군사적 위협을 가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그의 저서 <일본의 한국병합>에서 당시의 살벌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병합 당일인 8월22일 서울은 15간마다 헌병이 순회하고 두 사람이 모여 애기를 해도 헌병의 신문을 받았다고 할 정도의 경계 상태였다. 이렇게 쿠데타와 같은 방식으로 조선을 병합했지만 그 형식은 한국황제가 일본황제에게 병합을 신청하고 일본황제는 이 신청을 받는 형식이었다. 적반하장이란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5) 데라우치는 조약을 강권하기 위하여 협상의 장소를 한국 정부 관저가 아닌 통감관저로 정햇다. 그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대신들을 통감 관저로 불러 협박과 회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 및 대신들을 상대로 병합 후 농공행상을 무기로 서로 병합에 앞장서도록 기만전술을 가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한반도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정치기관의 통일(병합)을 이루는 방법밖에 없다”, “각원으로서 그 직을 그만둔다 할지라도 제국정부의 결의를 실행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으며, 그의 퇴피(退避)행위는 도리어 당국자 및 한국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만약 조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발동할 선언서는 무용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한국의 현상은 모든 일이 퇴폐(頹廢)하여 스스로 쇄신(刷新)할 힘이 없고 어느 나라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제 여러 말이 필요치 않으며, 그리고 일본국을 제외하고 달리 도와줄 나라가 없다는 것은 열국이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병합에 반대한 이용직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면직한다는 총독부 문서

 

6) 이 과정에서 데라우치는 “병합되는 마당에 국호는 무슨 국호이며, 조선 황제는 태공(太公)의 작위를 주겠다.” ,“현 황제를 창덕궁 李王전하. 太皇帝를 덕수궁 太王전하 또 황태자를 왕세자전하로 하는… 한국의 국토는 이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어떤 것도 이의 없음.”라고 했듯이 황제의 칭호는 물론 대한제국의 국호를 임의대로 ‘조선’으로 바꾸었다.

7) 그리고 일제는 이완용 함께 순종에게 합병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 순종황제의 계비(繼妃) 윤씨의 백부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에게 50만 원(圓), 친일파에게 3천만 원 내에서 임시 은사금을 하사하여 매수공작을 펼쳤다. 그리고 병합에 강력하게 반대한 학부대신 이용직(李容稙)은 일본에서 발생한 수해 위문을 빙자한 일본 관동지방 특파를 결정하여 내각회의 참석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등 반대자들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8) 일제는 이완용을 앞세워 8월 17과 18일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시종원경 윤덕영과 함께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일한병합을 기정사실화하고 ‘한국황제는 내각총리대신을 조약체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칙령 발표를 황제에게 제의하는 案을 갖은 협박과 강압으로 가결시켰다.동시에 한일 양국 병합 전권위원에 대한 순종황제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때 데라우치는 회의장 밖에 착검한 헌병대를 배치시켜 강압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비서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를 어전회의에 파견하여 감시하는 무례한 행동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순종황제의 칙서 또한 데라우치가 직접 작성한 문서를 그대로 번역ㆍ공포하게 하는 등 충격 그 자체였다.

9) 한편 일본에서는 발전.착전 기록과 같이 도쿄 일대에 발생한 대홍수로 인하여 추밀원회의가 소집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각에 보고할 서류를 갖고 갔던 나가오(長尾) 촉탁은 기차 불통으로 10일 간 연락이 두절되어 합법을 가장한 강점 계획마저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그러자 8월 22일 조약 안을 포함한 13개 안건이 상정된 추밀원회의는 오전 10시 40분에 개회되어 1시간 5분만인 오전 11시 45분에 모두 끝낸다. 보고원 가와무라(河邨)는 “모두 긴급을 요하며 여느 때와 같이 심사보고서를 작성할 틈이 없으므로 구두로써 보고한다”며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한 나라의 국권을 빼앗는 중대사안에 대한 심의ㆍ의결을 시간이 없어 구두로 처리했다는 것이다.즉 이 말은 홍수로 인하여 회싀 소집 시간이 늦어져 한국에서 체결되는 조인 시간을 맞출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9월 이완용 외 13명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할 것을 상주하는 데라우치의 문서 ▲이시영외 33명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할 것을 상주하는 가쓰
라의 문서

10) 이 조약문은 8개조(추밀원회의필기 내용 참조)로 구성되었으며 제1조에서 ‘한국 황제가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는 양여를 수락’을 규정하고, 제8조에서는 ‘일본국 황제 및 한국 황제의 재가를 거쳤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조약은 데라우치가 8월 22일 오후 4시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을 통감부 관저로 불러 전권위임의 칙서를 제시하는 것으로 조약 체결을 시작하여 조약문 2통에 조인했다.

이완용은 조인 후 “무사히 조약체결이 가능했던 것은 일왕의 후덕(厚德) 때문이다”라는 서명을 남겨 매국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조약 체결이 완료된 시각은 4시였으나, 일왕의 조약 최종재가안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8월 22일 오후 6시 30분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일왕의 재가를 받아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제8조의 기본원칙조차 완전히 무시된 것으로 절차상 흠결이 있어 완전 무효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1) 그리고 문건 곳곳에서 ‘병합’, ‘합방’, ‘합병’ 등으로 달리 기입하고 있어 조약의 명칭조차 정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1910.8.30일 한국병합조약을 전면게재하면서 고종,순종황제의 사진을 메이지일왕 사진아래 배치하여 군신관계를 암시한‘도쿄니치니치신문


12) 일제는 8월 22일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한국민의 저항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약체결 과정 및 결과가 언론에 의해 공개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할 것을 협의하는 언론대책도 있었다. 데라우치는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1910년 8월 29일 순종황제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경술 국치(國恥)’는 살아있다
일한병합이 발생하고 24년이 지난 1934년 11월 29일 일본 도쿄의 메이지신궁 앞 오모테산도(表參道) 빈터에는 눈길을 끄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일제의 대표적 국수주의자들이었으며 일본정계의 ‘검은 손’ 들이었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1864~1935),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1874~1937) 등 ‘흑룡회’ 세력이 주동이 되어 병합25주년을 맞아 일한병합기념탑 제막식이었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모양을 본 따 만든 이 탑은 일제와 한국인 353명이 낸 찬조금으로 건립됐다.


이 탑 건립추진위원회가 작성하고, 서지학자 李鍾學씨가 東京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하여 1986년 7월 21일 공개한 ‘일한합방(日韓合邦) 기념탑 건설에 際하여’ 라는 32쪽짜리 日文 소책자에 따르면 “역사의 현안(懸案)을 해결한 메이지일왕의 위업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서 기념탑을 세운다” 고 밝히고 “이 대업(大業)에 협력한 이들의 명단을 塔의 석실에 영구 보존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일한병합 공로자 명단이 새겨진 기념탑은 높이 32척, 바닥 직경 30척에 달하며 탑 주위에 쌓은 돌담길이는 1백척이다. 1934년 3월 설계도를 작성되어 5월에 발기인을 구성, 당시 총리였던 사이토의 재가를 받아 본격 건립사업에 착수했으며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등 일본의 대표적 재벌기업들이 건립비용을 찬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흑룡회’세력이 주동이 되어 다보탑을 그대로 본 떠 건립한 ‘일한합방기념탑’ (메이지신궁 옆 오모테산도(表三道)에 세워졌으나 현재 해체되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

즉 이 기념탑은 일제의 앞잡이였던 극우단체와 정부ㆍ재벌이 함께 참여하여 一進會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친일세력과 결탁하여 건립한 우리로서는 ‘치욕의 탑’인 것이다.

찬조금을 낸 한국인은 일진회장 李容九를 비롯한 간부 17명, 一進會 各道 회장 및 기타 임원 256명, 병합에 찬성하는 상소를 올린 서장보(徐彰輔) 등 유생 80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일한병합 조약의 서명에 직접 간여했던 이완용(李完用)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건립추진위원회는 소책자의 附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완용,박제순(朴齊純) 등 각료의 명단을 제외한 것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다. 이완용은 처음에 일한병합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데라우치 통감이 일한병합에 반대하는 자신을 제쳐두고 일진회와 손잡고 병합을 추진하자 정적이었던 일진회 간부들이 향후 권력 다툼에서 우위에 설 것으로 우려, 갑자기 태도를 바꿔 합방에 적극 나섰다.

▲2)오메시(靑梅市)에 있는 해체된 ‘일한합방기념탑’의 후면에는 유사이래의 현안인 한국강점을 해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한국강점 공로자,발기인,찬조인등의 이름을 새긴 ‘일한합방기념탑’ 副碑로 이바라키현 마카베(眞壁)에 있다.(한국강점자료집 제공)

자기의 이해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 선 것은 동양 도덕의 근본을 해(害)하고 신하의 도리를 저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물의 이름을 명단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우리 민족의 원한을 산 대신, 일본인들로부터는 높이 평가 받았을 것이란 추측과는 달리 일본인들로부터도 경멸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이후 문제의 탑은 오모테산도 우치다가문의 정원으로 바뀌었으나 1970년대 후반 도시계획으로 집이 헐리면서 탑은 철거됐다. 그러나 탑은 현재 비록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일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종학씨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 도쿄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인 이바라키현에 있는 유한회사 사노가(滋野家)란 석재공장의 석재 야적장에 이 탑이 해체된 그대로 보관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1934년 당시 이 탑을 건립한 공장이다.

이종학씨는 주인에게 “돈은 충분히 주면 팔겠느냐고 물었더니, ‘팔려고 갖다 놓은 게 아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이종학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념탑의 한가운데 있던 「일한합방기념탑」이란 돌조각이 신사 한곳에 비석처럼 서 있었습니다. 탑 뒤에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적힌 동판(銅版)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신사의 건물 내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한 번 보겠다고 했으나 신사를 운영하고 있는 극우단체 일본인들은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일본인들이 왜 그 탑에 그토록 애착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탑 모양 그대로 복원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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