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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

(1) 경찰제도 통일과 헌병대와의 관계

한국에 있어서 이전의 상태에 비추어 또한 장래 추세를 생각해 본관은 취임 당초 먼저 경찰제도를 통일하고 치안의 보전 및 질서 유지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해 이에 한국 헌병제도를 고쳐 헌병과 경찰이 피차 통일기관 아래서 활동하며 그 업무에서 조금의 실소도 없기를 기했다. 즉 헌병의 편제는 1910년 6월 이전에는 본부 및 7대 인원 약 2,400명이나 한국치안에 임무를 실행함에는 인원이 과소하므로 6월에 이르러 13도에 각 1헌병대를 두고 인원은 약 1,000명을 증가시켜 순사와 합쳐 주요지점에는 약 3리 반마다 초소를 한 곳씩 두는 것으로 하고 또 압록강 및 도문강(圖們江) 연안에는 국경 경비 초소를 늘려 설치키로 했다.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속에 부임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헌병증원의 대부분은 8월 10일까지 각 도에 도착했으며 최후에 도착한 약 300명은 정변의 시기에 대응할 필요가 있어 경성경비를 위해 한때 경성에 증가 배치했다. 또한 1908년 6월 이후 한국정부가 모집한 헌병보조원은 동 정부의 위탁에 의해 우리 헌병대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했으나 1910년 6월에 이르러 다시 한걸음 나아가 칙령 제301호에 의해 헌병보조원은 동 정부의 위탁에 의해 우리 헌병대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했으나 1910년 6월에 이르러 다시 한걸음 나아가 칙령 제301호에 의해 헌병보조원은 모두 우리 헌병대 예하에 귀속시켰다(당시 헌병보조원의 수 약 4,000여명으로 헤아림).

이와 동시에 헌병장교를 통감부 경무총장 경무부장 및 경시에, 헌병준사관 하사를 통감부 경부에 임용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헌병은 이렇게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경무총감부의 이원(吏員)이 되어 이에 헌병, 경찰은 거의 이체동심(異體同心)이 됐다. 위와 같은 시설로써 전한국을 통해 통일지휘하에 정연하게 경찰업무를 수행하고 특히 병합전후에 매우 평온한 치안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2) 한국주차군대의 경비배치

정변에 즈음해 전한국을 통틀어 작은 소요도 빚는 일이 없이 평화로운 사이에 시국을 종결시킬 필요를 생각해 폭도의 토벌과 북관(北關) 도문강 연안의 경비 및 수도에서의 응급한 준비를 위해 6월 중순부터 군대배치의 이동을 행하여 7월 9일 전부 완료했다. 즉 당시 폭도로 좀 알려진 것은 황해도 동북부와 강원도 북부의 채응언(蔡應彦)이 거느린 한 집단과 강기동(姜基東) 도당(徒黨)이 있으며 도문강 대안에는 간도 및 도문강 하류방향에서 북관에 침입하려고 기도하는 이범윤(李範允)의 도당과 ‘노오키에후스쿠’ 부근의 최도헌(崔都憲), 홍범도(洪範道)가 거느린 도당 등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세력의 경중 및 그 위해의 정도에 따라 지방 경비병력 배치를 변경하고, 또 경성부근에서는 시국에 즈음하여 급히 대응하기 위해 이 지방 부근에 보병 15개 중대, 기병 1연대(1중대 빠짐), 포병 1중대, 공병 1중대를 집결시킴. 7월 한순 본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래 친히 모든 정보를 종합해 시국발전에 책응(策應)하기 위해 8월 8일 주차군사령관을 불러 아래와 같은 주지로써 군부에 대한 요구를 개진했다.

(1) 주요한 큰 목적을 이루는 시기에 맞추어 고의 또는 유연이라도 지방에서 폭도, 초적(草賊)이 병발(倂發)하는 일이 있으면 참으로 유감스러우므로 각 지방에 있는 수비대는 전력을 다해 사전 예방 및 경계를 한층 엄밀히 할 것을 요함
(2)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특히 비교적 경성에 가까운 지방과 종래 폭도가 자주 활동했던 지방에서는 주도 면밀한 정찰 근무에 힘써 현재 두목이 숨어있다고 생각되는 지방을 취체하고, 철도에 따라 경성에 통하는 행로의 경비에 관해서는 특히 한층의 노력으로 사소한 차질도 없도록 기할 것을 요함
(3) 이상의 실행은 항상 헌병, 경찰과 서로 제휴하여 책응해 수도에서 정변이 발생할 예상시기 이전에 그 준비에 옮길 것을 요함. 단 그 실시에 있어 소요예방 위주로 하고 소요가 되레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거나 인민으로서 정치적 변동의 전제가 될 만한 행동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
위에 대해 군대의 준비행동은 엄밀히 그 목적을 감추어 곧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3) 경성에서의 경비

정변에 즈음해 경성 경비는 가장 긴요하고도 극히 주도면밀한 배치를 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본관이 착임하자마자 곧 군사령관의 경비계획을 보고 다시 몸소 이에 관한 의견을 지시했으며 또 한치의 빈틈도 없도록 거듭 조사연구를 반복시켜 8월초까지 군사령관은 경성, 용산 경비 규정을 정함. 그리고 이의 실시는 상황에 비추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 본관이 이를 군사령관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병력 사용은 부득이한 시기에 하기로 하고 헌병, 경찰력으로써 경성경비에 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경위를 막론하고 하나의 명령으로써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7월 하순 이후 경성, 용산의 모든 여러 부대는 그 병영에서 비밀리에 무장을 정비(整備)했다.
정변에 즈음해 한국군대의 동요는 항상 소요의 시작이 되는 게 과거의 역사로부터 명확한 고로 미리 이에 대응 준비할 필요가 있으나 종래의 경과를 보건대 항상 그 방법을 잃었기 때문에 소용의 단서가 된 것 같다. 여기서는 병력으로써 이를 위압하는 것을 마지막 수단으로 하고 먼저 그들이 어떠한 정변에 임해서도 생활방도를 잃거나 불행한 지경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밝혀두어 만약 소요를 빚는 일이 있으면 도리어 스스로 불행해 진다는 이치를 미리 이해시킴을 제 1수단으로 하고 군사령관 및 군대감독의 우리 장교로 하여금 미리 암암리에 그 의지를 전달케 하여 시국발전 이전에 거의 군대의 향배 및 그 태도를 평온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대의 하사, 병졸을 통해 인민에게 정변의 사실이 입으로 전해진다면 화근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8월 이후는 영외 외출을 완전히 금지시켜 외부와의 교통을 끊고 암암리에 감독을 엄밀하게 하는 수법을 다했다.

(4) 병합담판 개시 후의 상태

담판 개시와 그 경과는 절대 비밀을 보장해 헌병, 경찰의 경비를 주밀(周密)히 하고 어떠한 소요의 여지도 없이 담판의 종결을 보게 됐다. 이에 한국군대에는 특히 이병무로 하여금 그 뜻을 설득시켰다. 그러나 군대는 병합조약발표에 따라 전과 다름없이 군의 존재를 인정해 어떤 변경도 없는 관대한 처치와 미리 주의를 더해 감독, 위무한 효과는 조그마한 불안의 생각도 없게 하여 동요의 소인을 빚는 일 없이 이에 조용히 복종하여 종전과 같은 복무를 계속하게 됐다. 담판의 경과가 원만히 진행돼 만일을 염려했던 경비배치의 규정도 이를 현실화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단지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매우 조용하고 폭도의 병발을 보지 않은 것은 크게 경축할 일이다.
그러나 한편 군대, 경찰의 위력과 끊임없는 경비가 간접적으로 다대한 효력을 나타낸 것 역시 다툴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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