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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우키시마호


 

우키시마호 폭침시켜라
19세기말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하급무사들이 메이지 쿠데타라는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인하여 일본은 30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도쿠가와막부의 평화시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살육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난을 주도했던 철학의 깊이가 없는 3류 사무라이들과 일왕은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악마로 변하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지려고 하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나가사키(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세계최초로 핵폭탄이 투하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에 대규모 희생이 뒤따르자 일왕은 포츠담선언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은 패망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원자폭탁이 투하되어 일제가 패망한 것에 대하여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前나가사키 시장은 1998년 8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폭탄은 당연히 투하됐어야 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생각하면 천벌이었다. 일본은 화학.생물무기는 물론 학살.고문 등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원자폭탄보다 더 참혹한 고문으로 살해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은 잔혹의 극치며 일본인의 비인간성.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 범죄행위였다.”

일제는 전쟁에서 패망하자 강제징용.징병된 재일 한국인들의 학대와 도쿄 전범재판에 따른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패망 사흘 뒤 1945년 8월 18일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어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해군에 내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본정부의 유언비어를 조장했던 작태는 1923년 관동대학살 때와 똑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는 아오모리(靑森)현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의 오미나토항(大溱港)에는 우키시마호(浮島丸 4,730톤) 일명 ‘떠있는 섬 같은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함장 도리우미 긴고(鳥海金吾) 중좌와 해군경비부는 일본군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강제징용.강제징병된 한국인들에게 ‘한국으로 가는 배는 이 배편 밖에 없다‘, ‘배에 타지 않는 자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며 회유.강박하여 약1만2천 명을 그야말로 짐짝처럼 마구잡이로 배에 태웠다.

한편 우키시마호 승무원들은 전쟁이 끝났는데 한국에 가야 할 이유가 없고, 한국에 가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가져 출항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승무원들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회부하여 처형하겠다고 위협하여 강제로 출항시켰다.

우키시마호(浮島丸)는 원래 오사카상선 소속으로 태평양항로나 오키나와항로를 주로 운행하던 화객선이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일제가 아시아침략전쟁을 태평양 전체로 확대하기 3개월 전 1941년 9월3일 군에 징발되었다. 이 배는 군 장비를 싣고 운반하는 해군 특별수송선으로 개조되어 주로 쓰가루해협(津經海峽)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배는 쓰가루해협(津經海峽)을 빠져 나와 동해 니가타(新潟) 앞바다를 거쳐 쓰루가(敦賀)를 지나는 등 이틀 간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 안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약 1만2천여 명 승선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콩나물 시루와 같은 배 속에서 먹고 자는 것과 배설 문제는 고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승선한 한국인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진해로 가는지 혹은 원산으로 가는지 그 기항지(寄港地)는 정확히 모르지만 해방과 귀국의 기쁨을 만끽하며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우키시마호 항해 현황

  ▲1990.8.14 아사히신문이 제공한 침몰 장소

8월 24일 한반도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음료수 보급을 위하여 기항한다며 갑자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배가 해군기지 마이즈루(舞鶴)항 인근에 이르자 승무원들은  갑판에 있던 한국인들을 모두 선내로 황급히 강제

이동시켰다. 그리고 배가 시모사바가(下佐波賀)마을 인근에 접근하자 일본 승무원들은 구명정으로 대거 탈출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이 탈출한 직후 오후5시20분경 우키시마호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키시마호는 수천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이것은 뒤에서 밝히겠지만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침시킨 것이다. 이러한 작태는 ‘역사조작’과 ‘야스쿠니신사’에서 밝혔듯이 영혼이 피로 물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패망하자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로 여기던 한국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황폐화된 정신에서 발로된 최후의 발악이었다.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 일제는 악랄한 전쟁 죄상을 은폐하고 패전의 화풀이를 위해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다. 이는 일본정부 주도하에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순간 가장 많은 사람을 살상한 희대의 홀로코스트였다.

마이즈루(舞鶴)는 멀리 북쪽에서 날아 온 학이 날개를 펴고 쉬는 모습이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곳이다. 마이즈루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이었고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군항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일전쟁 때에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곳에 진을 치기도 했다. 마이즈루는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시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사항이다.

혼이 빠진 강제징용자 또 다시 학살하다
일제는 아시아침략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시모키타반도에서 대대적인 철도·터널·부두.비행장 공사 등을 강행하고 있었다. 시모키타반도는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써 해협이 험난하여 접근하기 힘들뿐 만 아니라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최악의 지형이다. 때문에 일본인들 조차 접근을 꺼려해 대부분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됐다고 한다. 우키시마호의 폭침으로 희생된 이들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진 뒤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강제 연행되어 온 힘없는 불쌍한 선량들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굶주림, 중노동, 고문과 학대 등에 시달리는 지옥과 같은 노예생활을 하였다. 호박.무 한 조각이 반찬이었고 끓인 바닷물이 국이었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기에는 담요 한 장으로 잠을 자야 했고 배가 고파 돼지 죽통을 훔쳐 먹어야 했다고 한다. 지옥과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하다 잡혀온 이들은 감독관들이 천장에 매달아 놓고 장작불을 피워 천천히 태워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항의하는 자들은 북방지역으로 강제 축출 또는 혀를 자르거나 칼로 베어 죽였다고 한다. 일하다 쓰러지면 몽둥이나 삽자루로 내리쳐 살해했다고 한다.

  ▲지금의 오미나토항구

죽으면 그 자리에서 묻어버리거나 터널 속에 시체를 유기했다고 한다.

이들은 가족을 울부 짖으며 불렀고, 터널 돌 벽에는 부모의 이름과 배고픔을 호소는 글귀를 손톱으로 새겼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다 피눈물을 쏟으며 숨져갔다. 해방으로 겨우 고기덩어리 하나에 불과한 육신을 건진 이들이었지만 영혼이 피로 물든 일제는 우키시마호 푹침을 통하여 또 다른 죽음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에 의해 혼이 빠진 육신을 차디 찬 바다 속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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