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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각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아소다로의 창씨개명에 대한 망언이 있자 일본의 권위지 아사히신문은 2003년 사설을 통해서 "창씨개명은 '조선인 황민(皇民)화'에 나선 일본이 마음 속까지 통제하려고 만든 정책이다. 조선인 중에 일본식 이름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왜 그랬을까. 식민 지배가 만들어낸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였다. 그런 차별을 만든 게 바로 일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아소 다로(麻生太郞)정조회장 상상력 빈곤을 애처롭게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신문은 또 "아소가 지적한 사실이 있었겠지만, 그건 자신에게 편한 사실만 거론하면서 그게 역사의 전체 상(像)인 양 얘기한 것이다. 또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조선에 도로.학교를 만든 것을 들어 '좋은 일도 했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한 그 누구도 일본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을 식민지 삼아 강권적으로 지배한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아사히는 "아소는 강연에서 '저쪽(한국)에게는 그냥 말하게 놔두면 된다. 이쪽(일본)은 당당하게 자신의 말을 하면 된다'라고도 했는데, 이래서는 외교 같은 것은 애초에 필요 없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으니 외교감각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소는 차기 총리후보의 한명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대로는 국정을 맡게 놔둘 수 없다"면서 "먼저 창씨개명 문제를 놓고 서울대에서 학생들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아소의 얄팍한 지식 수준을 비꼬면서 끝을 맺었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이에 대해 일본인 호사카 유지(保坂祐二)세종대 교수는 아소 다로 의원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먼저 원해서 시작되었다”라는 발언을 했는지 확인한 결과를 2003년 6월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 적이 있다.

아소 의원과 전화통화를 시도한 호사카유지 교수. 아소 의원은 창씨개명의 근거는 “조선총독부 부외사(部外史), 쇼와 2년(1927)”이라는 자료와 식민지시대 경험자들의 증언집 ‘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를 그의 여비서를 통하여 알려 주었다. 이 책 속에서 일본인 증인 중 두 사람이 아소씨가 말한 것과똑같은 내용을 증언해 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즉 당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조선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서 중국 사람들에게 차별대우를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이름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창씨개명의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위의 책 속에서, 한국인 증인들도 창씨개명에 대해 증언을 하였는데 그들은 아소 망언과 같은 말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한국인 증인들은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개명하지 않을 경우, <불량 조선인(不逞鮮人: 후테이센진)>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경찰관들이 집집마다 순회하면서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지도했다. / 원하는 사람만 창씨개명을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업을 할 수 없었다’는 증언이 눈에 띈다. 이렇게 볼 때 아소씨는 같은 책 속에 나오는 일본인의 증언만을 인용하여 조선인의 증언은 완전히 무시해 버린 셈이다. 즉 그는 같은 책 속에서 자신에게 편리한 부분만을 잘라 내, 마치 그 부분이 모든 진실인양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창씨개명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창씨개명을 제정한 법률은 ‘제령(制令)19호(1940.2.11.시행)’이고 다음과 같이 창씨를 법으로 명령하고 있다. <조선인 호주는 본령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새롭게 씨를 정하겠음을 부윤(府尹) 또는 읍, 면장에게 신고할 것을 요한다.(제령19호 부칙)> 그러므로 <창씨>는 완벽한 ‘강제’였다.

1982년 8월 10일부 도쿄신문이 교과서문제와 관련하여 창씨개명의 신고 숫자를 분석한 일본 문부성(당시)의 견해를 실었다. 이 기사 속에서 문부성은 『창씨개명』을 강제로 시행했다는 기술에 대해서는 ‘이것은 법제상 강제가 아니었고 임의 신고에 의한다는 방침이었으나 그 당시 6개월 동안 신고된 숫자가 80%를 넘었다는 사실을 보면 상당히 무리가 있었음은 확실하다’고 하여 창씨개명의 강제성을 시인한 바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아소씨의 발언처럼 스스로 창씨개명을 원한 조선인은 혹시 있었다 해도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이처럼 아소씨의 발언은 아소씨 자신이 제시한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논파할 수 있는, 수준 낮은 주장이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호사카 유지교수는 일본이 보수,우경화 되어 가고 있고 정치인들이나 논객들이 그것을 이용해 인기를 끄는 것을 바라보면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 한국인 만큼 분노하고 비판하던 그는 한국생활 15년 만에 아에 일본 국적을 버리고 2003. 11월 한국으로 귀화했다.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한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도서출판 답게)" 등 많은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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