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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뿌리를 없애라

◆ 일본의 ‘씨’제도는 서양의 개를 자처하고 도입한 제도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란, 씨(氏)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수천 년 간 뿌리로 존재하던 성씨를 글자 그대로 일본식 씨(氏)를 만들어 바꾸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진 표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한반도에서는 결혼을 하더라도 여성이 가지고 있던 성

▲黑船의 충격(1853년 미국 페리제독(Matthew.C.Perry)의 개항요구)

(姓)을 바꾸는 일은 없다. 한 집안에서도 본인 고유의 성이 여러 가지 존재하는 셈이다. 즉 남편과 부인이, 시모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요구한 창씨에 있어 ‘씨’ 제도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진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도로써 결혼을 하게 되면 부인은 남편의 성으로 바꾸어야 하는 제도이다. 호주를 비롯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같은 ‘씨’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여자)가 이○○(남자)과 결혼했을 경우 하○○ 성은 '하'그대로이지만, 씨는 '이'가 된다. 일본에서는 남편의 성이 후쿠자와이면, 후쿠자와 아무개로 불러 남편의 부속 호칭으로 예속되어 버린다. 이는 모계의 피가 부계의 혈통 속에 완전히 소멸될 뿐만 아니라, 관습적으로 이름마저도 소멸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미국과 일본에서는 여권신장운동의 하나로 성(姓)의 노예로부터 해방이 쟁점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 있어 이 제도는 옛적부터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1853년 미국 페리제독(M.C.Perry)의 개항요구(黑船의 충격)로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밀려오고, 1868년 3류 사무라이들이 찬탈한 메이지 쿠데타를 거치면서 비로소 제도화되었다. 여기에 게이오 대학(慶應義塾)을 설립하고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절대적인 영향도 있었다.

유키치는 ‘일본의 정신적 지주’, ‘일본의 볼테르’, ‘근대일본의 계몽사상가’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는 청일전쟁을 적극 선동한 주전론자(主戰論者) 이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세계의 비난 여론을 앞장서서 무마한 인물이며, 조선을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 , 즉 ‘야만 이하의 나라’ 라고 혹평하며 한반도 침략을 적극 옹호한 자이다. 또 그는 학문의 권장(勸奬) 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수천 년 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라고 비하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이러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와 진퇴를 같이하자는 뜻인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강조한 비열한 이중인격 자이다. 그리고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책을 통해서는 진부한 정통을 버리고 서양의 개가되어 무조건 서양을 따르자고 주장했던 자이다.

이러한 유키치의 주장은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공황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인간 도살자로 만들어 한반도.중국 제 아시아 국가들을 피의 광풍으로 휘몰아 넣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몸은 동양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서양인이 되도록 강요하여 일본인 특유의 카멜레온적 2중 플레이 즉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을 완벽하게 숨기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무서운 일본국민성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된 자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우경화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자이다.

하지만 일본은 경제성장으로 밑을 보지 못하는 거만한 스모선수와 같이 변하자 1만 엔 지폐에 기존 쇼토쿠(聖德)태자의 초상화를 밀어내고 유키치의 초상화를 삽입시켰다. 일본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폐에 이 자의 초상을 삽입하여 인간 도살 광풍에 대한 향수를 살리려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은 이 시기에 유키치의 절대적 영향으로 서양의 씨 문화를 서양의 주구(走狗-개,앞잡이)를 자처하면서까지 도입한 것이다.

◆ 조선총독부는 일본왕 직속 기관이다.


19세기 말 노쇄한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1895년 4월 전후보상의 하나로써 2억 냥의 배상금과 요동반도(遼東) ·팽호도(澎湖)의 할양. 대만(臺灣)을 일본의 식민지로 할양 등을 골자로 하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맺는다. 이에 따라 일제가 한반도.만주.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김을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 4월)을 단행하여 일제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그러나 일제는 1905년 5월 에스토니아 항구를 떠난 지 무려 9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당도한 러시아 짜르함대(또는 발틱함대)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격파한다. 러.일은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의 한반도.남만주. 남사할린 장악을 골자로 한 강화조약이 체결된다. 또 1905년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무력 강점을 묵인한다는 미.일간의 가쓰라테프트 비밀조약을 체결한다. 마침내 일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힘의 균형을 깨뜨리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에 대하여 폭거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일한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지배의 최고 통치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두었다. 조선총독부의 최고 우두머리는 육. 해군 대장(大將)이상의 계급을 지닌 자가 맡도록 하였다. 조선총독을 군수뇌부가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즉 한반도의 저항을 군을 동원한 강압.강권에 의한 지배를 그리고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하여 한반도를 통해 중국 침략과 아시아 침략전쟁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가 대만보다 훨씬 중요하고 비중이 높았다. 그 예로써 총독의 위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만총독부는 척무성(拓務省) 통제 하에 놓여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일한병합’에서 언급했듯이 일왕의 직속기관이며 조선총독은 일왕의 대리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8대(7명)까지의 조선총독이 있었다. 7명중 3명은 조선총독 역임 후 일본의 수상직까지 오르게 된다. 8대이자 마지막 조선총독을 지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거꾸로 조선총독에 부임하기 이전 일본 수상을 역임했던 자이기도 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조선총독의 권한과 책임이 얼마나 막강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침몰 직전의 러시아 함대

일전 아사히신문은 「조선총독부 간부 등의 식민지배에 대한 육성기록」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그 중 조선총독부 총무국 문서과장을 지낸 하기와라 히코조(荻原彦三)는 조선총독부의 위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총독은 일왕 직속이었다. 일왕을 대리해 일본국의 일부인 조선을 관할했다. 따라서 대신보다 중요한 권한과 권위를 부여 받고 있었다. 1년 이하의 징역 처분권은 총독의 재량이었다. 일본에서는 내각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따라서 조선총독은 다른 성청의 대신보다 한 단계 위였다. 일본 전반의 국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 조선총독은 맘대로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의 수탈과 반 만년 역사를 지닌 민족정신을 파헤치는 일제의 심장부였다.


◆ 악랄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1936년 7대 조선총독으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부임하자 한반도 통치에 대한 그 악랄함은 극에 달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일제가 패망할 때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자이다.

그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6대 총독 우가끼 잇쎄이(宇垣一成)에 이어 부임하자 1938년 조선어교육 폐지 및 일본어 상용, 1940년 2월 창씨개명, 같은 해 8월 동아.조선일보 폐간, 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등을 통하여 조선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그 중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지(內地) 즉 일본 본토와 ‘선(鮮)’ 즉 조선은 하나라는 뜻으로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 지배함을

정당화 시킨 슬로건>의 완성이라는 미명아래 한반도인들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의 ‘씨(氏)’제로 변경하는 창씨개명을 최대 역점사업으로 선정하였다. 일명 ‘혼(魂)의 과제’ 라고 까지 부르며 1939년부터 준비되어 이듬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 전격 강제적으로 시행하게 하였다.【 제령(制令) 제 19호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개정의 건”, 제령 제20호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

이에 앞서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오키나와를 강저병합했고, 1871년에는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을 강제병합하면서 ‘아이누 습속금지령’에 의거 창씨개명을 실시한 전력이 있었다.
시행일자 2월 11일은 일본인들에게는 중요한 날이다. ‘역사조작’에서 거론했듯이 조작으로 일관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1대 진무(神武)왕이 일본을 건국하였다는 날로써 기원절(紀元節)이라 부른다. 이는 메이지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끈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잔혹성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1872년 일본서기를 억지로 해석하여 제정한 국경일이다. 이 국경일은 일제가 저질렀던 아시아 침략 전쟁 패망 이후 폐지되었지만 1966년 경제성장으로 배가 부르기 시작하자 다시 ‘건국기념일’ 이란 명칭으로 국경일로 부활시켰다.



◆ 창씨개명은 ‘혼(魂)의 과제’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창씨개명을 일한병합으로부터 30년이나 흐른 시점에서 시행하게 되었나? 1930년대 초 일본은 한반도에 대해 문화정책을 수정하여 병참기지화 정책을 수행해나갔다. 병참기지화 정책이란 문자 그대로 한반도를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자는 것으로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한반도에서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일제는 우선 일본 국내의 식량부족으로 군량미 확보가 어려워지자 쌀을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헛소문을 퍼트리어 미곡공출(米穀供出)을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1941년에는 한반도 총생산량의 43.1%를, 1944년에는 총생산량의 63.8%까지 공출해 갔다. 이러한 무자비한 미곡 공출과 더불어 각종 농산물.생우(生牛)를 비롯한 축산물 등도 징발하였고, 심지어는 말을 먹이는 잡초라든가 송유(松油: 테레빈유)를 만들어 바치게 했다. 그리고 중국의 철광석(鐵鑛石)이나 미국의 설철(屑鐵:쇠똥) 수입이 막히자 고철(古鐵)은 물론 각 가정을 수색하여 놋그릇. 놋수저까지

강제로 징발(徵發)하고 강탈해 갔다. 이와 같은 일제의 최후의 발악은 우리 민족에게 극도의 궁핍으로 몰아 넣었다.

일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는 중일전쟁(1937~1945)의 장기화 및 최종적으로 식민지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국가 슬로건을 걸고 악랄한 살육전쟁에 동원할 인적자원인 군인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징병의 편의를 염두에 두고 시행되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1942년 한국인에 대한 징병제가 일본 각의에서 결정되고 2년 후인 1944년 한국에서도 징병제가 시행하게 된다. 결국 황국신민화 정책은 우리 민족성을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일본왕의 신하로 편입시켜 수탈을 극대화하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우리말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집집마다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신부(神符 :符籍)를 배부하여 이를 섬기도록 강요했다. 우리의 족보(族譜)를 수탈(收奪)해 가는 동시에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모욕적인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해 나아갔다.

이렇듯 창씨개명은 일제가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적자원 확보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철저한 준비와 일제에 협조적인 소설가 이광수(香山光郞), 변호사 이승우(梧村升雨), 종로경방단장 조병상(夏山茂), 문명기(文明琦一郞) 등을 앞세워 신문에 그들의 ‘선씨(選氏) 고심담’을 싣는 등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다. 하지만 시행 첫날인 1940년 2월 11일 48건, 다음날까지 87건이 접수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시행기간 6개월 중 전반 3개월간에 이루어진 창씨는 한반도의 총 호주 수 약 400만 호 중 불과 7.6%에 불과했다고 한다.

단 발 령

    ▲단발한 고종황제

▲거리에서 단발을 하고 있는 체두관

1895년 고종황제는 극악무도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이후 일제의 배후 조정을 받는 친일파로 구성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 의거 양력을 채택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상투를 잘라 현대의 머리로 단장하는 제도)을 하달한다.
친일내각은 고종황제의 머리를 직접 깎게 하고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체두관(剃頭官.머리를 짧게 자르는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은 머리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조상.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요,


 근원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했다. 대학자 최익현은 “단발을 할 바에야 목을 잘라 달라”고 하며 반발하였다. 단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들고 온 전국의 유생들이 궁 앞에 하얀 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885~1886년 러시아정부가 파견한 ‘조선탐험대’소속 장교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단발령에 대한 반대가 전국적으로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강대하여 정부에서는 일본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결국 민중의 힘에 의해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민중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렇듯 단발령에도 전국적인 민중의 반대에 부딪혀 내각이 무너졌는데 하물며 수천 년 이어져오는 가계에 대한 족보를 바꾼다는 것은 당시 백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익현선생은 약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일본인이 주는 음식물은 먹을 수 없다하여 물 한모금 먹지 않고 단식하다가 굶어 돌아가셨다.지금도 매년 대마도에서는 일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 2000년 전통을 지키자

총독부는 자신들의 예상이 빗나가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에 미나미 지로는 공권력을 앞세워 폭력과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극히 일부분인 친일파는 자발적인 신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고율이 미미했던 시행 전반기와는 달리 후반 3개월 동안 70%가 넘는 한반도인이 창씨를 행했다는 건 강요가 얼마나 심했었나를 반증해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경찰서·지방행정기관의 독려·감시 하에 강행하였다. 여기에 친일단체들이 각종 독려 강연에 나섰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한반도인에 대하여는 강제연행, 각종 인허가 불가, 일본으로의 도항 불허가, 자녀 학교 입학 금지, 직장 취업 불가,  민원 서류 취급 불가, 미행 사찰, 우선적 강제징용 및 위안부 차출, 식량 배급 금지, 우편 배달 제외 등 악랄한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국민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일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을 총동원하였기에 당시 국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붙잡혀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용으로 옥사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조차 1942년 1월 29일 일본유학을 위하여 히라누마(平沼)라는 창씨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부터 씨족 의식이 강했던 우리 민족은 성을 바꾼다는 것은 가장 큰 굴욕으로 여겨 이 강요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설사 성을 바꾼다 해도 갖가지 희비극이 빚어졌으며 어떻게 하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일례를 들면 김씨는 金을 남기려 김산(金山), 이씨는 이가(李家), 장씨는 장전(張田)을 청주 한씨는 청주의 옛 이름인 서원(西原)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제를 겨냥해 욕하는 견자(犬子). 견분(犬糞) 같은 성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창씨개명의 강요를 거부하고 자결한 이도 있었고,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한편 오늘날 여자의 이름에 ○자(子)로 작명하여 부르는 것은 그 당시 잔재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 대만의 창씨개명
한편 일제는 식민지 대만에도 창씨개명과 비슷한 “개(改)성명”이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의무제와는 달리 대만에서는 허가제였다. 즉 대만인 스스로 개성명 신고를 했다. 하지만 개성명을 신청하더라도 일본관리의 '허락'이 없으면 일본식의 ‘氏’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개성명이 허용되는 대만인의 조건으로는 ‘일본어에 능통할 것’, ‘신청인의 집안에 신(일본왕)을 제대로 모시고 있을 것’ 등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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