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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 증언

◎ 리콴유(李光耀) 前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증언과 함께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시절 성노예 문제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나는 케언힐 로터리를 따라 울타리 밖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일본군을 봤다. 근처에 사는 사람의 애기를 들어보니, 그 안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여자들이 사는데 이 여자들은 군부대를 따라 다니며 병사들에게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이었다.병사 200여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느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나는 그날 여자들은 보지 못했지만 ‘위안소’라고 한문으로 적힌 표지판을 봤다. 그런 위안소가 중국에 있다는 애기는 들어봤지만 이젠 싱가포르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 구보타 데쓰지(久保田哲二) 前일본군 상사

난징대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인 여성을 군위안부로 동원한 일본군의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에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제의 아시아침략 전쟁 당시 일본 히로시마 보병 11연대 소속으로 1939년부터 45년까지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前 일본군 상사 구보타 데쓰지(久保田哲二·82). 그는 2001년 11월 대구 곽병원 대강당에서 ‘대구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주최로 열린 ‘남경대학살 참전 일본병사 강연회’에 참석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구보타씨는 최근 한일 양국간의 현안으로 부상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보고 내가 목격한 ‘역사적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성노예 문제와 관련해 “당시 (일본군)부대 내의 위안소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조직적으로 관리 운영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위안소에서 10대로 보이는 조선인 처녀가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군대가 직접 위안소를 관리해 우리는 군표를 들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곳을 들락거렸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노인 둘과 함께 피난 가는 민간인 여덟 명을 죽였고, 지나가는 여성을 강간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살육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차마 할 수 없는 숱한 만행을 저질렀어요. 군국주의가 심어준 ‘조선인과 중국인은 인간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위안소에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신대 피해자중 이용수 할머니가 “왜 뒤늦게 이제야 증언하느냐?”고 구보타씨를 꾸짖었다. 그는 “정말 죄송하다. 한동안은 경찰의 감시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며 용서를 빌면서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국가가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구보타씨는 “한일 양국이 선린 우호의 동반자로 지내기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먼저 과거사를 솔직히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이케다 마사에(池田正枝)
일제하의 서울 모 국민학교 교사로서 어린 제자들을 성노예로 보낸 이케다 마사에(池田正枝)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당시의 학적부를 찾아내어 공개 했다. 기록부에는 어린 학생들을 성노예(위안부)로 동원하는 경위와 설득 과정 등이 소상히 적혀 있는데, 그들의 비인도적인 행위는 새삼 우리를 전율케 했다.

◎ 박 영심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박 할머니는 2005년 4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에 밝힌 체험담에서 "일본놈들이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증언했다. 박할머니는 "일본놈들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솥에 넣어 끓였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 같은 놈. 사람가죽을 쓴 야수.식인종 무리였다"라며 피눈물로 증언했다.

박 할머니는 1938년 3월경 17살 때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에 있는 '금수로 위안소'였다고 한다. 박할머니는 일본놈들의 요구에 반항하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봅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 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다며 치를 떨었다.

◎ 정 옥순 .김 대일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정 옥순, 김 대일 할머니는 2005년 8월 11일 노동신문에 다음과 같이 피눈물로 증언하면서 치를 떨었다.
"하루는 일본군 장교 8명이 벌거벗고 나타나 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놈들은 나에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갖은 짓을 다 했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빨로 놈들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물고문을 시킨 뒤 나체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등 가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입 안에 쇠몽둥이를 넣고 휘둘러 이빨이 모두 부러졌고 입술을 뒤집어 바늘 도장으로 입묵(문신)을 하기 시작해 온몸에 흉한 그림을 그렸다.”

"평양이 고향인 여자가 임신을 했는데 하루는 다나카라는 자가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녀를 쓰러뜨렸다. 놈은 사정없이 그녀의 배를 걷어찬 다음 군도로 배를 쭉 갈라 태아를 꺼내 내동댕이쳤다. 다나카는 이어 다른 위안부를 모아 놓고는 여자의 내장을 칼 끝으로 끄집어 낸 뒤 목에 걸고 방바닥에 낭자한 피를 핥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때 많은 여자들이 기절했고 심장이 파열돼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

◎ 훈 할머니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반 세기 만에 밟으니 목이 메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가족들을 꼭 찾아주십시오. 나를 그렇게 나쁘게 한 일본 군인들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도 궁금합니다. 왜 끌려가게 되었는지” 이 말은 17세 때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97년 반백 년 만에 고국을 찾아 피를 토하듯 내 뱉은 캄보디아 거주 성노예 출신 훈 할머니의 말이다. 훈 할머니는 일본 패전 후 의지할 곳 없는 이역에서 10여 년을 온갖 천대를 받다가 오직 살기 위하여 캄보디아인과 결혼하여 살아왔었다. 그녀는 2001년 2월 76세의 일기로 이국 땅 캄보디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 박 옥 선
2001년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귀환하지 못한 채 중국 땅에서 60여 년 간 살아온 '제2의 훈 할머니' 박옥선(78세).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린의 한 오지 마을에 살고 있는 박 할머니는 18세 때 1941년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헤이룽장성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약4년 동안 일본군을 상대하는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 박 할머니는 '방직공장인 줄 알고 따라 나섰다가 휴일이면 문 앞에 줄을 서서 재촉하는 병사들을 상대하다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 남았다'고 증언했다.

◎ 곽 영 남씨, 박 차 순씨
한국정신대연구소는 2003년 제보를 받고 중국을 방문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 가 60년 넘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곽영남(78)씨와 박차순(80)씨를 찾아냈다. 이 중 곽씨는 고향 방문을 희망하는 반면, 박씨는 고향 주소를 기억하지 못해 귀환을 망설이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에 따르면, 곽씨는 20세이던 지난 1944년 중국 신양에서 1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생활했으며, 광복 이후 돌아오는 방법을 몰라 중국에 남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할머니 박씨도 20세이던 지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중국 우창(武昌) 등에 끌려가 4년 정도 성노예 생활을 했다. 박씨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위안소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수치심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 노동신문 
2005년 8월 11일 북한 노동신문은 일제의 성노예(위안부)에 대한 만행을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일제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들을 동물적인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써 뿐 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인체실험 대상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육체를 식료품으로, 전략물자로까지 대치하는 전대미문의 살인만행도 거리낌없이 감행했다"

이 신문 일제시대 요코스카(橫須賀) 해군병원에서 일했다는 한 노인의 증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병원에서 매독에 걸린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자주 진행됐다. 살인귀들은 인체실험이 끝나면 더는 쓸모가 없게 된 위안부의 명줄을 끊고 내장은 내장대로 드럼통에 담고 몸체는 토막을 내 밀차(손수레)에 실어 적재장으로 날랐다.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그것을 싣고 어디론가 갔다가 다음날이면 기름이 든 드럼통을 실어 오곤 했다. 그것은 사람의 기름이었다, 놈들은 그것을 항공유에 섞어 전쟁에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일제 침략군 야수들은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 죽이고 일본도로 토막 내 나눠먹는 상상 밖의 몸서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이었다.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기 타 생 존 자 증 언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성노예 출신의 할머니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 "우리 마을에서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나에게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 "반장 부인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 집에서 적어도 딸 한 명씩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식모로 있던 집의 딸을 대신해서 어떤 일본인을 따라 나섰다."
◇ "집안이 가난해 너무 배가 고팠다. 어느 날 일본 공장에 취직 시켜 준다며 여자를 모집한다기에 나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모집에 응했다."
◇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순경에게 붙들려 그 길로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갔다."
◇ "학교 담임 선생이 정신대에 나가라고 했다. 선생의 말이라면 반드시 복종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일본 도오야마현에 있는 공장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 견학만 시킨 뒤 곧바로 남양군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 성노예 할머니 지원운동 펴는 미츠코(信川光子)

"한국의 위안부(성노예) 출신 할머니들이 저의 어머니들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가족입니다." 일본에서 위안부 할머니 돕기 운동을 벌여 온 평범한 가정 주부인 일본인 노부카와 미츠코(信川光子.일본 사이타마현 소오카 거주). 노부카와는 95년 뜻을 같이 하는 친구 30여 명과 함께 '할머니들과 함께 걷는 모임-조각보'를 결성했다. 98년 모임이 해체될 때까지 도쿄(東京) 등 일본의 대도시에 있는 학교.직장에서 30여 차례에 걸쳐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는 집회를 열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증언을 듣고 할머니들과 서로 붙잡고 울곤 했어요. 학교에서 전혀 배우지 못한 역사이므로 충격이 컸던 것이죠. 학생들이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할머니들께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꼈어요. 노부카와는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까지 할머니들의 한(恨)이 치유되지 않은 것이 가슴 아프다"며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성노예(위안부) 할머니 돕기 운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吉見義明는 그의 저서 ‘종군위안부’에서 '종군위안부란 일본군 관리 하에 놓여져 무권리 상태인 채로 일정기간 구속되어 장병에게 성적 봉사를 강요 당하는 여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은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1. 군대가 여성을 계속적으로 구속하고 군인이 의식하지 않고 윤간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조직화이고 여성에 대한 중대한 인권 침해이고
2. 인권차별.민족차별이며
3. 경제적 계층차별이자
4. 국제법 위반행위요, 전쟁 범죄라고 지적했다
또한 종군위안부 문제는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국가가 추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이 문제를 ‘복합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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