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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상징물


코무덤을 사적으로 지정하다
일본 교토(京都)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다. 교토는 794년 칸무(桓武) 일왕이 이곳으로 천도했다. 에도(江戶)막부 정치 개시로 정치적 기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기는 했지만, 1868년 메이지 쿠데타 주동자들이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고대 일본정치의 주무대였던 천년고도(千年古都)다. 일제가 저질렀던 아시아침략 전쟁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을 당시 미국은 교토의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격대상에서 제외시킬 정도였다.

이러한 교토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괴이한 유물이 하나 있다. 이른바 일본말로 '미미쓰가'로 불리는 반구형 무덤인 ‘귀무덤(耳塚)’이다. 이것은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 선조들의 코를 베어 가 묻어 놓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승기념물이다. 드라큐라백작이 이 무덤의 유래를 안다면 기절초풍하여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피가 거꾸로 돌고 울분이 치솟아 목이 메일 희대의 악랄한 유물이다.

이 무덤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전쟁의 화신.살인의 악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신으로 승격시켜 놓고 있는 교토(京都) 히가시구(東區) 규조(九條)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에 있다. 일본은 이토록 잔인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이 무덤을 1969년 2월 12일 사적(史蹟)으로까지 지정하였다. 이러한 작태는 일본이 전쟁과 살인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렀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잔혹한 작태를 일반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덤의 안내문에는 "이 귀무덤(耳塚)은 .... 도요토미의 가신(家臣)과 무장이 고래(古來)의 전공(戰功) 정신으로 머리 대신에 조선국민 남녀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와서 도요토미의 명에 따라 이곳에 묻고 공양을 드렸는데 이것이 귀무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 무덤 축조가 자신들의 자비심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코무덤(鼻塚)’에서 풍기는 잔혹함을 감추기 위하여 ‘귀무덤(耳塚)’이라 조작하고, 고대 최고의 하이테크 제품인 도자기 하나 만들지 못했던 일본의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조선을 불법으로 침략하여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이 자행된 전쟁을 미화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영웅으로 칭송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코무덤은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 사전에 대처하지 못하여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의 결정체이다. 일본으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잔인함과 호전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이다.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통곡과 원한이 서려있는 코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살인의 화신 도요토미

도쿠가와(德川)막부 시절 하급무사로서 핍박 받아오던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3류 사무라이들은 고오메이(孝明) 일왕 독살을 시작으로 정권을 찬탈했다. 이른바 메이지 쿠데타이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메이지쿠데타는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 내란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러자 이들은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수도를 도쿄로 천도하고, 정적(政敵)들의 눈을 밖으로 돌리기 위하여 정한론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조작하여 우매한 국민들을 역사치매로 만들어 살인과 전쟁에 광분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라고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영혼과 철학의 깊이가 없는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의 정한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300여 년 전 이들과 같은 천박한 3류 무사 출신으로 정한론을 실천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립한 히데요시의 무자비한 살인과 잔혹한 학살의 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300여 년간 도쿠가와(德川)막부로부터 살인의 화신으로 그 존재를 인정 받지 못했던 도요토미를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하고, 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와 코무덤 중건에 착수한다. 그리고 1898년 3월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 선봉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10대손 구로다 나가나리(黑田長成)를 비롯한 군국주의자들을 이곳에 모아 히데요시의 전쟁혼을 주입시키기 위한 진혼제를 치렀다.

16세기 후반 당시 일본은 히데요시에 의해 내전이 끝나고 전국이 통일된 상태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농민들의 무장 봉기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영주들은 봉록과 영지를 갖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등 미완의 통일이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토지제도를 정비해 지방 영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 농민들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전문적인 직업군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무사들만 무기를 갖도록 명령한다. 이에 반해 히데요시에게 충성한 영주들에겐 땅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자기를 따르는 다이묘(1만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 즉, 영주들을 앞으로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전쟁 승리 후 국내 토지는 이미 분배해줬으므로 향후 새로운 영주에 대한 토지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그 해결책으로 조선침공을 생각한 것이다. 한 예로 히데요시의 측근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明을 정벌하면 20개 성의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히데요시가 영토 배분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권 안정을 도모하는 즉, 2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의도였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음력)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니 길을 열라는 황당한 구실로 조선을 침공한다. 이상은 흔히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의 발단 내용이다.

◆ 문화재 약탈 전쟁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그들의 치부를 숨기고, 그들의 역사를 조작하기 위하여 호도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 전쟁의 본질은 일본이 일명 ‘도자기전쟁’이라고 했듯이, 고려청자.조선백자 등 찬란히 빛나는 조선의 선진기술.문화를 약탈하기 위한 세계 전쟁사에 있어 가장 악랄한 ‘문화약탈전쟁’ 이였다.

고대 최고의 하이테크 제품은 도자기였다. 오늘날까지도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 나라들이 무수히 많지만 도자기는 8세기 세계 최초로 중국이 완성했고, 한반도는 9세기에 완성했다. 하지만 일본열도는 16세기까지도 토기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지몽매한 땅이었다. 즉 일본의 기술 수준이 한반도와는 약 700년 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개밥그릇까지도 도자기를 사용했지만 그렇지 못한 일본 열도는 수입에 의존했다. 하지만 도자기가 워낙 비싸 약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왜구들의 노략질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 나간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하여 오히려 제주도가 노략질의 본거지였다고 호도하기에 바쁘다. 조선에서 개밥그릇까지 노략질한 왜구들은 그것을 그들의 성주에게 바치는 충성심이 7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도적질해서 약탈해간 조선도자기로 인하여 ‘다도(茶道)’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와비차(わび茶) 다도를 완성시킨 사람이 센노리큐(千利休)다. 센노리큐는 승려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다. 그는 "무사도가 죽음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다도는 삶의 예술이다."라고 말하면서 와비차(わび茶) 정신을 담아내는데 가장 적절한 찻그릇으로써 조선의 사발을 선택했다.

센노리큐의 영향으로 노략질하여 가져간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다완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르렀고 일본왕도 무릎 꿇고 보아야 한다는 ‘신같은 존재’ 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찻사발 하나는 오사카성(城)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조선 다완을 소지한다는 것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다완 연구가 하야시는 “다완은 조선시대의 막사발이지만,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신앙 그 자체이며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고, 한없이 기쁘게 했고, 숭고하게 했고,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주었던, 우리에게는 보물 아니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그 신비로움을 극찬했다.

이렇듯 도자기를 만들 수 없었던 일본으로서는 조선도자기가 그야말로 접근할 수 없는 신보다 더 존귀한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기술 수준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약탈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 도공들을 통째로 잡아올 방법을 강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본질이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가 전투부대 외에 포로부,도서부, 공예부, 금속부, 보물부, 축부 등 6개의 특수부대를 조선에 보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도서부는 이름 그대로 조선의 각종 책들을 약탈해갔다. 금속부.보물부는 목판 및 금속 활자본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축부는 가축을 끌고 갔다. 공예부는 왜구들이 도자기로 된 조선의 요강(尿綱)과 개 밥그릇까지 수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는 기록과 같이 각종 도자기 약탈부대였다. 이때 약탈해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려.조선 도자기들은 일본의 국보로 변해져 있다. 이들 도자기들은 일본 오사카(大阪) 시립박물관.동대사 박물관을 비롯한 일본 각지의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어 도자기의 진수를 보려면 이 곳을 찾아야 할 정도다.

포로부는 약 10만에 달하는 조선인을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로 삼기 위하여 끌고 갔지만, 일본 주자학의 선생이라 불리는 강 항(姜沆)과 같은 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바로 도공이나 공예기술자들이다. 조선을 침략한 장수들은 자기 가문의 영달을 위하여 조선 도공들을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끌고 갔다. 오늘날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구시키노시(串木野市) 미야마(美山)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도자기의 원조(元祖)로 불리는 수관도원(壽官陶苑)의 심당길(沈當吉), 규슈 사가현(佐賀縣) 아리타(有田)지방에서 도조(陶祖)로 불리는 이참평(李參平), 그 외 사카 고라이자에몬(坂 高麗左衡門), 다카토리 하치잔(高取八山)과 같은 수 많은 도공들이었다.

포로로 끌려 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사회 근본 자체를 혁신시켰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물이 스며드는 토기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임진왜란 패전 후 조선포로들을 돌려줄 때 도공만은 절대 돌려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의 임진왜란 패전 막바지 당시 조선 도공 80여 명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던 규슈 사쯔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심당길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의 신분을 '무사'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가마이름에 ‘사쯔마야키(隆摩燒)’라는 국명까지 내려 이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일본이 도자기를 손에 넣기 위하여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고, 조선도공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최고의 신분까지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 도공들에 의하여 탄생된 일본 도자기는 근대일본의 수출품 1호가 되었다.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는 서양에 일본을 알리는 얼굴이었다.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유럽의 왕후귀족들은 앞다투어 일본도자기를 찾았다. 심지어 독일의 마이센(Meissen),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일본도자기를 베끼기 시작했다. 일본의 도자기산업은 19세기 개항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 출품을 계기로 일본도자기가 다시 한번 유럽에 큰 영향을 주어 마침내 아르누보(art nouveau)를 낳게 하였다.

조선에서 노예로 끌려간 이들 도공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일본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들이 기여한 바는 지대했다. 그러나 철학과 역사의 뿌리가 없는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하여 형이하학적인 것만 수용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보지 못하는 우둔한 민족임을 만 천하에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이 진정한 사무라이 나라라고 한다면 약탈하고, 침탈한 조선 문화재의 소유에 대한 만족감보다 그들 조상들이 저질렀던 잔학하고 아둔한 짓거리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3류 사무라이 집단으로 금수보다 낮을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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