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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베기 전쟁

민초들의 승리
임진왜란은 시작되었고 임진왜란 전까지도 불안했던 히데요시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대략 700여 척의 병선.15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침략한 왜군은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2개월 만에 전라도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연전연승하자 히데요시는 미친개같이 기뻐하며 대륙까지 점령하는 영웅이 되는 줄 착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왜군은 세계 전투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23전 23연승을 한 이순신장군의 혁혁한 활약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초들의 활약에 의거 연전 연패하였다. 이에 왜군은 개전 당시의 병력 3분의 1이 겨우 살아 남을 정도의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명나라 원군마저 도착하자 왜군은 한반도 남쪽지방에 왜성을 만들어 놓고 지구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패배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한반도 절반의 할양을 요구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그는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려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로(일본의 서쪽)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로의 사람들을 옮겨 서로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 이라며 7개조로 된 ‘포고’를 발표한다. 1597년 정유년 1월 15일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다시 침략했다. 이것이 일명 정유년 왜구가 다시 난을 일으켰다는 뜻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정유년에 한반도를 다시 침공한 히데요시는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간 것은 전라도민의 조직적인 반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버려라. 충청도,경기도와 그 밖의 도에서는 알아서 평정하라”는 정신병자와 같은 명령을 하였다. 이것이 정유재란 때의 ‘코 베기'라는 천인공노할 참극의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는 히데요시가 전라도민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연전 연패하였고 전라도 호벌치 전투에서 의병들에게 패함으로써 전라도 지역만은 점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히데요시가 전라도지역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일본의 패망으로 종식되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전라도 지역을 일본에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호벌치이란 웅치(熊峙 :완주), 이치(梨峙:금산에서 전주 사이), 금산(錦山)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전투는 선비.농민.천민.승려 등 모든 계층의 의병들이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정신으로 무장하여 왜군을 격퇴시킨 전투다. 이 전투 이후 조선백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을 격퇴시키는 등 민초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요, 만약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어진다”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코를 베어라
정유년 재차 침략한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사기가 땅에 떨어져 싸울 의지가 별로 없었다. 왜군 선봉부대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한반도에 상륙은 하였지만, 이순신장군 등 의병들의 강력한 활동에 전라도에 가기를 꺼려했다. 울산.서생포.부산포 등 왜성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반년간이나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전투를 독려하기 위하여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다. 죽인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보내라. 병사 한명 당 코 한 되씩 수량이 찬 후에야 생포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랄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대마도 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가문의 집사인 야나카와 시게노부(柳川調信)라는 자가 1597년 6월 15일 부산에 상륙하여 이 명령서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전달하였다. 이 명령서를 받은 가토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병사 한 명당 3개의 코를 베어 오도록 다시 지시하였다(기요마사조선기). 이리하여 인류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왜군의 만행은 시작되었다.

전라도의 남원성 일원과 충청도 지역에 침공한 왜군들은 앞 다투어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죽여 목을 자르고, 코 베기에 혈안이 되었다.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은 물론이고 전공(戰功)을 부풀리기 위하여 민간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코와 귀를 베었다. 심지어는 금줄이 달린 집에까지 들어가서 산모와 갓난아이의 코까지 베었다고 한다. 죽이고 귀와 코를 자르니 세상 온 천지가 피바다가 되었다. 왜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불을 지르니 집들이 잿더미가 되어 연기가 고을마다 자욱했으며, 귀와 코가 잘린 어린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우는 소리가 온 산천을 진동하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이렇듯 코베기 전쟁은 정유재란 1597년 8월 이후 왜군이 철수했던 이듬해 1598년 11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은 왜구의 이러한 무지막지한 침략으로 문화재는 약탈.파괴 당하고, 경작지는 거의 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조선은 인구의 반 이상을 잃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왜구의 침략은 조선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코 영수증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머리를 베어갔고, 다음에는 귀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를 베어갔다. 이 같은 사실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가신이었던 야마모토 야스마사(山本安政)의 일기에서 알 수 있다.  "임진년에 주로 조선인의 귀를 자르다가 코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정유재란 때였다."  또 다카토라(藤堂高虎)의 가신 나가토 기타우에몬(長野喜多右衛門)는 "조선인의 코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게이쵸연간(慶長 年間 : 1596∼1615년)때 이다." 라는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정유재란 때부터는 귀 대신 코를 잘라 갔다. 이렇게 베어진 조선인 코는 전과보고서를 첨부하여 히데요시의 코수집관(메쯔께)에게 인도되었다. 이때 일본군 부대장들은 수집한 코를 인도할 때 코가 썩지 않도록 통상 소금.석회 또는 식초에 절여 나무통(桶)이나 항아리에 1천 개씩 넣어 보냈다고 한다. ‘코 수 360개를 받아 코 수집관에게 인도하였음’, ‘죽인 사람의 코 10,040개를 확실히 인수하였음’은 코영수증(鼻請取狀)의 한 토막이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죄악상을 고발하는 문서가 현재 일본의 야마꾸찌(山口)현 문서보관소, 아마기시의 아끼즈까향토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를 비롯한 여러 곳에 전시되어 있다.

베어진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그 수를 확인하고 나서 “코 몇 개를 받았다. 수고했다”는 내용의 치하장을 코를 보낸 무사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베어간 코는 히데요시 앞으로 보낸 것도 있지만 무사들이 그들의 호전성과 전과를 과시하기 위하여 오카야마현의 천인비총(千人鼻塚)과 같이 따로 보관한 것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기록 등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쟁에 참가한 오카와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가 쓴 ‘조센 모노가타리(朝鮮物語)’에는 “1598년 1월 조선 사람의 코 18만 5738개, 명나라 사람의 코 2만 9014개, 합계 21만 4752개의 코가 매장되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중국의 중조관계사논문집(中朝關係史論文集 1988)에는 “1차 침공 때 부산,동래,한성,평양,진주 등지에서 대량 학살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무려 수십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비극적인 역사가 담긴 말 ‘애비’
목은 물론 코와 귀를 베어내는 당시의 처참한 참상을 상상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를 더욱 더 전율시킨다.
일본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 :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 고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 사람의 머리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쓴 임진왜란 야사(野史)인 징비록(懲毖錄) : "적병은 무릇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모두 코를 베어 위세를 보였다."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姜沆)이 기록한 간양록(看羊錄) : "히데요시는 왜장들에게 머리 대신 코를 베어오게 하였으므로 왜군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고 그 코를 베어 소금에 담아서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히데요시는 조선정복의 야망을 품고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에게 기도를 하기 위해 호코지(方廣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 1년 전 조선침략전쟁의 업적을 일본 국민들에게 과시하고 이를 후세까지 길이 남기기 위한다는 뜻에서 이 절 앞에 조선에서 베어온 코를 모아 '코무덤(鼻塚)'을 만들었다. 1597년 9월 28일 도요토미의 부하 세이쇼오 쇼오다이(西笑承兌)가 지은 비석에는 “장병들이 적의 목을 베어 보내야 하나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보내게 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가엽다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 대하듯이 공양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그 잔혹성을 미화하는 가증스러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일본 문헌 태합기(太閤記)에는 ‘조선에서 베어온 코를 그 안에 묻고 후세에 남기어 그 이름을 다른 나라에까지 떨치었다’고 하여 일본의 잔혹성을 과시하고자 만들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의 새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절 유명한 학자 하야시 라산(林羅山)은 ‘코무덤(鼻塚)’이라는 너무나도 잔인한 명칭에 고민하다가 이 비석을 없애고 ‘귀무덤(耳塚)’이라고 조작하였다.

이러한 광풍이 몰려 간 후 전라도와 남쪽지방에서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애비'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에서 '애비'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물건을 만지지 못하도록 겁을 줄 때 사용한다. 이 말의 어원은 귀와 코를 말하는 '이비(耳鼻)'로써 일본이 저지른 세계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코베기 전쟁의 비극적인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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