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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역사의 시작

역대 일본의 잔혹한 전쟁사 내면을 살펴보면 서기 762년 신라 침공 계획을 수립한 당시의 절대권력자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20세기 초 청일,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비롯한 3류 사무라이들은 천민 출신 또는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하급 무사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절대권력을 움켜지자 그들의 약점과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적 관심을 외부로 돌려 그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특히 메이지 쿠데타는 상대방을 생각하고 칼등을 쓰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은 문과 무를 겸비한 1급 사무라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모술수와 무자비한 잔인함을 무기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3류 사무라이인 이토오 히로부미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와 같은 자가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는 근대 동아시아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던 것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로부터 조선통신사 외 기타의 방법으로 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의 근본을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정권을 찬탈한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한반도보다 더 큰 서구사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사냥꾼이 사냥개를 토사구팽하듯 메이지 쿠데타를 큰 획으로 하여 한반도와 철저히 단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종결 지쯤을 즈음하여 일본경제는 불황에 접어들어 실업자가 늘어갔다. 주가는 폭락하고, 생필품 가격은 폭등하는 나날이었다. 정부는 실업자들로 인한 사회불안의 원인을 일본에 체류해 있는 한국인 탓으로 돌려 왔었다. 일자리를 잃은 일본 노동자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밥줄을 빼앗는 놈”들로 생각해 왔다. 여기에 농민들의 권익투쟁이 고조되고, 일본 공산당 창당, 사회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으며,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등 한국인들과 일본의 대립 감정이 고조된 터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와병 중이던 가토 도모사브로(加藤友三郞) 수상이 사망하자 내각이 총사퇴 하면서 후임 총리로 군벌 출신인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가 지명되어 山本내각의 출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새로운 내각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정권 무중력 상태에서 대지진이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은 100만에 이르렀고, 부모처자·형제자매는 뿔뿔이 헤어지게 되어 서로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부족하고 잘 곳도 없었다. 시민들은 왕궁앞 광장, 히비야(日比谷)공원, 우에노(上野)공원 등으로 피난하는 등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대혼란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정부는 무엇보다도 지진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에서 식량난에 의한 민중폭동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회 전반적인 여건은 한국인들을 속죄양으로 만들기에 적합하기까

▲화가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본명은 다케오(竹尾) 후에 黃丘로 개명)의 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중 간판을 들고 부모친지를 찾는 사람들

지 한 환경이었다. 일본정부는 또 다시 재일 한국인들을 속죄양으로 삼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군중의 대혼란을 목격한 치안담당자 내무대신 미즈노 랜타로(水野連太郞),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세(赤池濃), 내무성 경보국장 고도 후미오는 혼란을 틈타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해 혁명운동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현실화해 대학살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매한 민중들에게 진실을 외면하도록 하고, 악마의 피를 부르는 얄팍한 민족적 증오 감정을 자극해 정부를 향한 민중의 공격성을 조선인에게 돌리는 비열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라!

이들은 대혼란 속에서 군중의 불만과 분노가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책동과 연계하여 정부에 대한 폭동으로 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일본은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면 경찰력만으로 진압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결국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기로 했다. 그러나 군대 출동에는 계엄령 선포가 필요했다. 문제는 계엄령을 시행할 사유였다.
계엄령 제1조는 ‘계엄령은 전시 또는 사변에 임하여 병비로써 전국 또는 일부 지방을 경계하는 것을 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전쟁이나 내란(사변)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계엄령은 발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대혼란은 지진과 화재에 의한 것으로 전쟁도 내란도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으로 3·1운동을 체험했고, 한국의 독립을 희구하는 한국 민중의 투쟁을 일본 지배층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내무대신 미즈노를 비롯한 이들 세 사람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조선인 폭동’이란 유언비어이다. 이들은 대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불만과 분노를 한국들에게 향하도록 하고 한국 독립을 위한 민중 투쟁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조선인 폭동’이라는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여 우매한 군중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전위시킨 것이다.

이는 치안 최고 책임자 내무대신 미즈노 랜타로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 날 아침(9월 2일)이 되자……조선인 소동이 일어났다.……계엄령을 시행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일본정부 당사자가 유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은 조선인 폭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시행했다고 미즈노 자신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 자작극인 유언비어를 유포하라!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과 방화.강간.강도.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등의 각가지 유언비어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퍼뜨렸다.
지바(千葉)현 후나바(船橋)시 해군무선 송신소에서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도쿄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현재 도쿄 시내에서는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로 방화하려 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는 충분히 주도면밀한 시찰과 조선인의 행동에 대한 엄밀한 단속을 실시하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전국의 부(府)·현(縣)지사에게 통달을 하달했으며
관동 각 현에는 “재향군인회원.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협력해서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법을 강구할 것”을 지시 했고
관하의 경시청 경관을 시켜 각 구·군·시·읍의 자치회, 재향군인회 등에 전달했다.

이렇게 유포된 유언비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만 흐른 것은 아니었다. 파출소 앞에는 '조선인폭동'이라는 벽보가 내 걸리고 경찰은 제정신이 아닌 민중을 향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유언비어를 인쇄물로 만들어 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군부 고위층인 제14단 참모장 井染大佐는 9월 7일자 ‘不野新聞’에 '이번 불령선인들의 행동의 이면에서 사회주의자와 소련의 과격파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이 3자의 3각 관계를 기초로 하여 되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포고했다.

신문들도 뜬소문을 그대로 보도해 우매한 민중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여 학살에 불을 지피며 한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정을 악화시켜 나갔다.
9/7일자 이바라끼신문 외 언론들의 보도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다.
『…각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이재민의 자녀에게 주는 빵 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떤 村에는 조선인 일단의 습격으로 촌이 거의 전멸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전부터 화살표 위에 두 줄기 불빛 같은 표를 찍어둔 듯하다』
『2천명이 팔을 끼고 다니며 부녀자 20~30명씩을 붙들어 놓고 강간한다.』
『총살된 선인들은 폭탄 휴대자들이다 』
『붉은 천을 팔에 감은 자는 폭탄 가진 자요, 노란빛은 독약 탄 자이다』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였고 그밖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정책에 의해 농토를 유린당하여 살기 어려워 일본에 건너와 헐값에 노동력을 팔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학생들도 어려운 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바쁜 한국인들이 수천 명씩 무장하여 군대와 대결할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당시 퍼뜨린 유언비어가 지진 발생 두 세 시간 만에 시시각각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간 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 관리들의 조직적인 유포 내지는 방조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유언비어는 지진 발생 세 시간 만인 오후 3시경부터 나돌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경과에 따라 리얼해져 갔다. 9월 1일부터 3일 사이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한 각종 유언비어를 시간대별로 기록한 일본경시청의 『大正大震火災語』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월 1일
(오후 3시) 사회주의자와 선인의 방화가 많다
9월 2일
(오전 10시)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인을 뜻함)들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 9월 1일 화재는 다수의 불령선인들이 방화 또는 폭탄을 던져서 일어난 것이다
(오후 2시) 그들은 단결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감행하며 부녀를 능욕하고 잔존 건물에 불을 질러 파괴하는 등 폭동이 심하여 전시(全市)의 청년단, 재향군인단 등은 현(縣) 경찰부와 협력하여 이를 방지코자 노력하고 있다.
(오후 2시) 요코하마 방면에서 내습하는 선인의 수는 약 2천 명으로, 총포. 도검 등을 휴대하고 이미 오오고(大鄕)의 철교를 건넜다. 군대는 기관총을 비치하고, 선인의 입경을 차단시키고자 하며, 재향군인 청년단원 등도 출동하여 군대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군대를 失口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오후 4시) 原田町을 습격한 2백여 명은 다시 相原·片倉의 두 마을에 침입, 농가에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고 부녀를 살해했다
(오후 4시) 선인들이 鶴見 방면에서 부녀자를 살해했다
(오후 5시) 선인 1백10명이 寺島에서 관내 四木橋 부근에 모여 흉기를 휘두르며 폭행을 하고 방화도 한다. 선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폭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는데, 진재가 돌발함에 따라 예정계획을 변경하여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독약을 유용하여 제도(帝都) 전멸을 꾀하고 있으므로 우물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것은 위험하다.
9월 3일
(오전 1시)
선인 약 2백 명이 本鄕·向島 방면으로부터 대일본방적㈜와 隅田역을 습격했다
(오전 4시) 선인 수백 명이 本鄕·湯島 방면으로부터 上野공원에 내습한 모양이니 속히 谷中 방면으로 피난하라. 짐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오전 10시) 군대 약 30명이 선인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月島에 갔다
(오후 3시) 선인들이 경찰서에서 석방되었으니 속히 이들을 잡아 죽여버려라.
(오후 6시) 선인이 시내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
(오후 9시) 上野공원과 불타버린 곳에는 경찰관으로 변장한 선인이 있으니 주의하라.

이렇듯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 '방화 강도 강간을 벌인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등 이런 유언비어들은 일본인의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진재의 공황 속에서 한국인은 일본민중의 공동의 적이 되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日변호사聯보고서에서도 확인되었던 것과 같이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증거가 확실하므로 그것은 유언비어가 아니라 일본이 책임회피를 위한 또 하나의 역사조작이요, ‘한국인을 살해하라는 암호’였다.

조선인을 학살하라!

일본정부는‘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하라. 조선인을 보면 타격해도 무방하며 살해해도 관계없다'며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전직 군인과 젊은이들로 구성된 자경단(自警團)이 도쿄 1,593개, 가나가와현 603, 사이타마현 300, 치바현 366, 이바라키현 336, 군마현 469, 기타 16개, 합계 3,689개의 자경단이 조직됐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군대·경찰·자경단에 의한 인간사냥, 한국인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총.칼.톱. 곤봉. 몽둥이. 죽창으로 무장한 이들의 외침은 "조선 놈이면 다 죽여버려라"는 것이었다.
▲화가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본명은 다케오(竹尾) 후에 黃丘로 개명)의 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중  칼과 죽창 곤봉을 든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장면

‘내 부모 내 자식과 아내를 죽인 것은 다 조선 놈들이다. 내 집을 부수고 우리를 기아의 지경에 몰아넣은 것도 그놈들 때문이다’. ‘죽여라 쳐버려라’ 외치며 자행된 학살은 박살, 사살, 교살 등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한국인 살해가 저질러졌다. 일본 내무성에서 지방에 내려 보낸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이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돼 학살에 기름을 붓은 격이 되었다.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의 조사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관동지역에 살던 3만여 명의 한국인 중 생존자 약 7천여 명을 제외한 2만 2천여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증거가 인멸된 후 사고조사에 나섰기에 6천 6백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밝혀쪘다. 하지만 얼마나 되는 인원이 학살되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죽임을 당해야 할 영문도 모른체 처참하게 죽어갔다. 도시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인간도살 현장이었다.

쯔보이 시게하루라는 한 일본인 여류작가는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에 대한 색출과 학살 현장의 살벌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찰.군인.자경단 등은 버스.열차 안 혹은 길거리에서 승객들에게 “15엔(円) 15전(錢)”, “ぱぴぷぺぽ (빠삐뿌뻬뽀)”등과 같은 어려운 일본말을 발음하게 하거나 ‘교육칙어’를 암송하도록 해 발음이 이상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하고 칼과 몽둥이,죽창으로 마구 찔러 처참하게 살해하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일본 관헌들은 일인들에게 머리에 흰띠를 두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방법만으로 구분이 어려워지자 ‘아이우에오’로 시작되는 일본 '가나'를 전부 외워보라든가, '링고(사과)'를 발음해 보라, 심지어는 역대 일본 일왕의 이름을 대라 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한인을 골라내기 위한 수단은 천인 천 가지였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군중 심리에 좌우되어

   ▲흰띠를 한 자경단의 조선인 살해 장면

누군가 ‘조선인이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와! 하면서 개떼처럼 달라 들어 처참하게 죽였다. 이들은 이성을 가진 집단.국가가 아니라 저능한 동물집단이나 할 짓을 저질렀다. 붙잡힌 사람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와 함께 중국인 폭동설도 유포되면서 중국인도 수백 명 학살됐다고 한다. 피의 악마에 물든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한국사람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학살 방법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피에 굶 줄인 악령들의 축제를 일본국가가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코하마(橫濱) 근처에는 속칭 “根岸별장” 이라 불리는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다. 지진으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이 파손되어 도망쳐 나온 죄수들이 7,8백 명 되었다. 이들도 한인을 잡는 수사대에 합세하는 참으로 귀가 막히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며 한국인을 철야로 사냥하여 살해했다. 한인 시체는 쿠라모토다리(倉本橋) 제방 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매달아 놓고 린치를 가했고, 죽은 사람은 매단 줄을 끊어 시체를 물 속에 빠뜨렸다. 하천은 몇백 명의 시체가 쌓여 붉게 물들어갔다. 마을 수색대에 의한 참극은 5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살기에 찬 이들 자경단원들은 한국인을 거리나 집안에서 찾아내 죽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에 일시 보호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군마현(群馬縣) 경찰서 토건업체인 까시마구미(鹿島祖)가 고용하고 있던 한국인 14명을 회사측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자경단대표가 경찰서로 달려와 한인들을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4,5명의 경찰관들은 서장이 오면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중들은 당장 넘기라고 우겼다. 결국 자경단원과 2백여 군중이 몰려와 소동을 벌이다가 14명의 한국인을 전부 살해했다.

기거정(奇居町)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9월 4일 요코하마 네기쪼(根岸町)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한 한국인은 몸에 지니고 있던 감기약을 독약으로 오인 받아 파출소 옆에 동여 매인 채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가메이도(龜戶)경찰서에서 벌어진 사건은 학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인학살은 자경단이나 경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계엄령 미명 아래 동경시내에 진주해 들어온 군대도 가세했음이 여러 증언자들이 밝히고 있다. 도쿄지역에 치안유지를 위하여 배치된 군인들은 가메이도경찰서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총칼로 한인들을 밤 세워 죽이기 시작했다. 피에 굶 줄인 군인들은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 비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일대의 강아지들은 참혹함의 극치에 미동조차 하지 못하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서만 하룻밤 사이에 320여 명에 이르는 한인이 학살됐다. 경찰서 구내에서 벌어진 이러한 학살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경찰이 강력히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실상 묵인, 방조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뼈아픈 사건이다. 천재(天災)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인재(人災)였다. 1923년 9월 1일 바로 이날은 “한국인 대학살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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