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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 관련 증언 사례

◇ 保坂祐二 세종대 교수
호소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들을 너무 심하게 괴롭혔어.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인의 머리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봤으니까"

◇ 일본인 越中谷利一
진재 당시 나라시노(習志野)기병대의 견습사관으로 계엄령 선포 직후 동경에 진주했던 越中谷利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열차 안에는 피난민들이 석탄 위까지 파리떼처럼 빽빽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끌어내렸다. 그러더니 칼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피난민은 폭풍우같이 "와" 하는 만세소리와 함께 국적(國賊) 조선인을 다 죽여버리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 일본인 羅 丸 山
가메이(龜戶)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던 羅丸山은 "나는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군인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는 총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 들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경찰서에서 9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32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새벽 시체들은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딘지 모르지만 운반되어 갔다."고 회고했다.

◇ 일본인 八島京一
9월 4일 일찍 龜戶경찰서 순사 3,4명이 짐차에 석유와 장작을 싣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八島京一과 잘 아는 淸一이란 순경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죽은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거야.”라고 해 "죽은 사람들?"했더니 "어제는 밤을 새워가며 죽였는데 32명이나 되었어. 외국 사람들이 서에 온다니까 급히 태워버리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 철도 기관사 平田鐵
철도기관사인 平田鐵씨는 스미다가와(隅田川)의 永代橋 아래에서 한인 시체 1천 2백여 구를 보았다고 전했다.

◇ 불문학자 田邊貞之助
대지진의 불바다에 이어 관동 일대는 조선인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동경을 가로지른 아라가와(荒川), 스미다가와(隅田川) 두 강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4,5백 평에 가까운 공지에 반나체의 시체가 3백여 구 뒹굴고 있었다. 목이 잘려 기관지와 식도 등 경동맥이 꺼멓게 드러났고 뒤에서 목덜미가 베어져 벌겋게 살점이 드러난 것, 억지로 찢어 끊은 흔적이 역력한 잘린 머리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더한 광경은 젊은 여자가 배가 잘린 채 죽어 넘어진 가운데 6,7개월 된 태아가 죽어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음부에는 쇠사슬과 죽창이 꽂혀 있었다. 내가 일본인이란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 경찰관 아라이 겐지로
당시 사이타마 혼죠경찰서의 경관이었던 아라이 겐지로는 어린이들은 일렬로 늘어서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고, 그 후 부모들은 책형에 처해졌다. 살아있는 조선인의 팔을 톱으로 자르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와 딸이 와서 “내 아들은 도쿄에서 이 놈들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시체의 눈알을 칼로 파내는 것을 봤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

◇ 구로자와 아끼라(黑澤明)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진재 당시 유언비어의 허구성과 조선인 학살의 무모함을 그의 자서전 <구로자와 아키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의 어른들이 “여기다!” “아니, 저기야!”하고 소리치면서 이리저리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나는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수염이 난 한 사내를 쫓고 있었는데 얼굴에 그렇게 털이 많이 난 사람이 일본인일 리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가족도 우에노지역 근처의 화재 때문에 집을 잃은 친척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수염을 길게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몽둥이를 든 무리들이 아버지를 에워쌌다. 나는 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가슴으로 아버지와, 함께 서 있는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조소하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순간 열화 같은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졌다. “바보 자식들!” 그러자 그들은 순순히 흩어져 사라졌다.

우리 동네에서는 각 집마다 한 사람씩 보초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형은 이 모든 생각에 비웃음을 보낼 뿐 아예 순번을 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내가 죽검을 들고 나갔더니, 고양이 한 마리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하수관에 나를 배치해 주었다. 그들은 거기에 나를 배치하며 “한국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을 지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욱 우스운 일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동네 우물들 중 한 곳의 물을 퍼 먹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유인즉슨 그 우물 둘레에 쳐진 벽 위에 하얀 분필로 이상한 부호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물에 독을 탔음을 표시하는 한국인 암호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추론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은 그 부호라는 것이 바로 내가 휘갈겨 놓은 낙서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 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부흥기념관(復興記念館)
일본 도쿄(東京)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공원 안에는 復興記念館이 있다. 이곳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자 58천여 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 위령당에는 "1923년 9월 간도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천여 명의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마음속 깊이 추도합니다." 라고 시작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조(日朝)협회 회원들이 73년 세운 것이다. 이곳 관계자는 “이 공원 인근 강에선 지진으로 다리가 무너졌는데 군인들이 조선인들을 그곳으로 끌고가 학살한 후 강에 버렸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공원자료관 2층에는 관동대지진 이후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다. 몽둥이를 든 자경단원들이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한인을 검문하고 때리는 장면이 있으며, 그림 옆에는 여러 권의 원고지 뭉치가 있다. 당시 학생들이 남긴 작문에는 “길에서 조선인 살해 등 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당시 일본 학생들이 쓴 ‘대지진 조난기’에는 거의 모든 작문 속에서 한국인 학살 목격담이 몇 대목씩 꼭 기록되어 있다. 지진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인 학살이 얼마나 충격으로 비쳤나를 알 수 있다. 이 작문은 도쿄을 비롯한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琦玉) 등 관동지방 소학생(초등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이 쓴 것으로, 오랫동안 도서관 창고 속에만 간직되어 일반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지진의 참화 속에 재일 한국인들이 당한 참상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학교 4년 男) 조선인이 냇가와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해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물이어서 그 물을 퍼 마시고 밥을 짓고 했다. 그 뒤 조선인들을 10명쯤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소학교 5년 女) 3일 아침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죽여 죽여"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조선인이 나쁜 짓을 해 붙잡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자부(麻市)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곳곳에 비상선을 치고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붙잡아 버렸다.
(소학교 5년 男)…가는 도중 새까맣게 탄 시체, 물에 떠 있는 시체, 조선인을 죽이고 있는 곳…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 그날 한밤중 "저기 조선인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권총소리가 들렸다.
(고등과 1년 女)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조선인 15명이 권총을 들고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망을 보았다. 끝내 선인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얘기가 있어 친구와 함께 보러 갔다. 가보니 길가에 두 명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일동은 만세를 불렀다 .
(고등학교 2년 男)…시각은 정각 11시였다. 씩씩한 나팔소리와 함께 땡땡 경종이 난타 되었다. 잠시 후 "조선인들이 권총 등을 가지고 쳐들어오니 모두 분투하라"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나는 마음속에 '결사'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조선인이 오는 모습은 없고 나팔소리도 잠잠해져 적막이 흐를 뿐. 비로소 유언비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포의 밤이 밝았다. 백명 쯤 되는 조선인이 포박되어 열 댓 명의 군인들에게 호송되었다. 지난밤의 총소리는 이들 선인들을 잡기 위한 공포였다.

이상과 같은 작문에는 한국인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 묘사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조선인들이…했다더라?’ 조선인들이 권총을 들고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등 간접 전언(傳言)이거나 소문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참살하거나, 한국인이 당한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본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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