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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조사 활동

일본정부가 학살을 조장했다
9월 5일을 기점으로 학살은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유언비어의 실체가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도 많은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에 학살의 대상이 없어져 소강상태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일본 소방대본부는 9월 6일 동경 日日新聞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소방대가 불을 끈 곳은 23개소가 되지만 방화는 한 곳도 없었다. 또 조선인들이 폭탄을 투척할 장소에 분필로 표시해 두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조사해 보니 이는 청소회사 인부, 신문배달부, 우유배달부들이 그들의 편리를 위해 표시해 둔 것이었다.”

이 기사 가운데는 유아사(湯淺) 경시총감의 말도 인용되어 있다. "이재민들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폭행 소문이 나돌자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예로 조선인이 폭탄을 가지고 다닌다 하여 붙들어 조사해 보니 사과였다. 또 한 민가 주부가 솜을 초에 적셔 세면기에 담가둔 것을 청년 자경단들이 보고 방화용 석유로 오인, 그 주부에게 조선 사람에게 가담한 사람이라 힐문한 실례도 있다."
그 외 유언비어의 허위성을 밝혀낸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한편 한국인 대학살 태풍이 휘몰아 친 이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만 죽였더라면 우물쭈물 거짓말하여 넘어 갔겠지만, 한국인과 얼굴 모양이 비슷한일본사람도 상당 수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인 줄 알고 죽이긴 했으나 살인은 살인이고 보니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살인 동기가 나오게 되었다. 자연 당국의 지시와 선전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부 당국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살해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 만행을 저지른 자경단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경찰은 이들의 검거를 묵인함으로써 책임을 자경단에게 전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허나 이 같은 태도에 분노한 자경단 연맹은 궐기했다. 결의문을 발표하며 자경단의 만행 원인을 '정복한 관헌'들이 조장했음을 폭로했다. “조선인을 볼 때에는 살해.타격해도 관계없다. 그들은 흉기를 휴대하고 도처에서 살인, 강도, 능욕, 방화 등 모든 악행을 하고 있다고 선전한 자는 누구인가. 당국은 이를 요코하마에서 강도질한 모모 등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직접 우리에게 전달한 자는 바로 정복 경찰관리였다. 유언비어의 출처에 관하여 당국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민중에 전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외쳤다.
결의문은
1. 유언비어 출처를 당국이 책임지지 않고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것,
1. 필요할 때 자경단의 폭행을 방치하고 있다가 지금 와서 그 죄를 묻는 이유,
1. 자경단원의 폭행만 문제 삼고 허다한 경관의 폭행은 비밀에 붙이는 것 등에 대해 힐난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경찰 관헌의 분명한 대답을 구함'이라는 글을 게재해 공개 추궁을 하였다. 법학박사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愼吉)은 시민의 의혹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유언비어의 전파는 경찰이 자동차 포스터, 말 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전케 하여 퍼뜨리고서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시민의 목격을 무시하고 관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책임회피
▲폭동의 진압을 못한 책임
▲인민을 함부로 살상해 태워버린 가메이도(龜戶) 사건에서도 경찰과 군대의 폭행은 알려져 있는데 책임회피를 하는 점
▲헌병이 무정부주의자 오오스기(大杉)와 그의 처, 어린이 3명을 죽인 사건에 대한 책임 등이다.

일본정부의 방해공작
한국에는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각 경찰서를 통해 이와 같은 움직임을 엄격히 감시하였다. 동아.조선 등 언론이 학살 진상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강화했다. 9월 5일 재경 일본 유학생들은 유학생 생사확인을 위한 집회를 가졌다. 재일동포 친족회는 실태조사를 결의하는 대회도 열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경찰 당국은 경계와 단속을 강화해 나갔다. 9월 7일에야 비로소 유언비어 단속을 공포했다. 이로써 9•10월 두 달 동안에 불온언동으로 단속된 사람이 1천 3백 17명, 법규 위반으로 검거된 자는 122명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학살에 대한 동요나 문책론이 등장하자 일본은 무마책의 일환으로 시급히 '조선인을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등 생존자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나라시노(習志野), 目墨경마장, 相愛會, 총독부 유학생 감독부 등에 한국인 약 7천 5백 명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진상을 조사하려는 자유법조단 등의 단체 활동을 오히려 방해했다.

일본정부의 책임회피
한국인의 무고한 학살이 명백해진 이상 최소한 피살자 수. 군인. 경찰. 자경단 중 학살범은 누구인지, 살해 방법. 살해자 처벌. 피살자 보상 문제 등을 명백히 밝혀야 했다. 진재의 혼란 상황에서 숫자 파악이 어려웠겠지만 일본정부는 자신들은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용했었다며 학살자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인 학살이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수백 명 선이라고 얼버무렸다. 일본정부는 끝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조사를 거부하고 국가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말 동경에 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北星會 등 각 단체 유지들이 발기해 20여 명으로 구성된 '이재동포위문반'은 피살자 수를 5천 명 선으로 추산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은 당시 도쿄와 요코하마에 약 3만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진재 직후 각처에 수용된 생존자 7천 580명을 제외한 2만 2천 420명이 희생자로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시체로써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실종자 2만 2천 420명 가운데 1/4 정도로 줄잡아 5천명 이란 숫자가 나온 것이라 한다. 일본정부의 비협조로 조사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 독립신문사 김승학 특파원을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 등에 의한 자체조사에서는 6천 6백 61명으로 밝혔고, 이를 12월 독립신문에 발표했다.

日변호사聯보고서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2003년 8월 25일 진재 당시의 일본정부 자료와 형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한국인 학살을 유발한 유언비어가 일본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됐다는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80년 만에 일본의 공공단체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회는 일본정부가 유발한 책임이 있다면서 고이즈미 총리에게 사죄와 진상규명을 권고했다.

일본 변호사연합회 조사보고서에는 “9월 2일 오후 3시 자경단원이 ‘폭탄과 독약을 소지하고 있다’며 경찰서로 끌고 온 조선인이 갖고 있던 것은 설탕이었다.” 라고 밝힌 지진 발생 다음날 취임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당시 일본총리의 글과  “진상을 알 수 없는 피난자들의 지나친 정보”라고 적고 있는 당시 군 문서도 포함하고 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학살을 유발한 유언비어는 당시 경찰이나 군 기록에도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관되게 기술돼 있다. 

그러나 일본변호사연합회 조사보고서는 한국인 학살의 근원이 되었던 유언비어의 진원지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지진이 일어 난 후 지바현 후나바시(船橋) 해군송신소에서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전국의 부(府)·현(縣)지사에게 보낸 “도쿄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현재 도쿄 시내에서는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로 방화하려 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는 충분히 주도면밀한 시찰과 조선인의 행동에 대한 엄밀한 단속을 실시하라”는 전문과 내무성이 사이타마(埼玉)현 등 도쿄 인근의 현에 대해 “재향군인회원,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협력해서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법을 강구할 것” 등을 지시한 전문이 한국인 학살의 큰 원인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치안유지를 위해 도쿄시내에 들어온 군대까지 가세했음을 밝히고 있다. 조사보고서가 제시한 자료 ‘관동계엄사령부 상보’에 따르면 9월 3일 도쿄 오오시마(大島)에서는 조선인 200명이 군인들에게 살해되는 등 3~4일 이틀간 230여 명이 살해됐다고 밝히고, 조사보고서는 “기록에는 군인들의 정당방위인 것처럼 돼 있으나 학살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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