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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탄생

명성황후 시호

2003년 6월 문화재청은 고종(高宗)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합장 능(陵)인 사적 제207호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소재)의 침전(寢殿·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지은 집)을 해체 작업 중이었다. 문화재청은 작업 도중에 이 곳에서 재해 방지를 기원하기 위해 물 ‘수(水)’자가 새겨진 육각형의 은판(지름 45㎜, 두께 0.8㎜) 3점과 종도리 장여(도리를 받치는 모가 진 나무) 부분에서 세로 0.95m, 가로 12.9m의 붉은 비단에 쓴 명성황후의 공덕을 칭송하는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광무 5년(1901년) 8월 21일자로 된 상량문에는 간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에 대한 국모로서의 덕망과 애국심에 대한 칭찬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혜악보담어빈궁고독 공고만세종사지기[惠渥溥覃於貧窮孤獨 鞏固萬歲宗社之基] :두터운 은혜가 널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만세에 계속될 종묘사직의 기틀을 공고하게 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2년 후 광무 1년(1897년)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명성황후 유해는 원래 청량리 홍릉에 모셔져 있다가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에 따라 1901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移葬)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19년 고종황제 마저 악랄한 일제에 의거 독살되어 승하하자 고종황제와 합장 됐다고 한다.


국모의 자리에 오르다

명성황후는 몰락한 양반 가문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1851년(철종 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의 나이에 양친을 잃고 고향을 떠나 서울의 일가에 몸을 의탁하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불운한 소녀는 15세 되던 1866년 3월 조선 26대 고종의 왕비로 책봉 받아 꽃가마를 타고 궁중에 들게 된다. 고종보다 한 살 위로써 고아나 다름없는 그녀가 국모에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강력한 섭정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대원군은 당시 모든 부패의 온상이 바로 왕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외척이 적은 아내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황후를 들여 왕

▲프랑스L`ILLUSTRATION지에 게재된 명성황후사진

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명성황후야말로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춘추좌씨전’ 등 책을 즐겨 읽던 총명하고 지혜로운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부대부인을 공경했으나 정작 지아비인 고종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에게는 이미 궁인 이씨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대원군은 그런 황후를 동정해 황후의 가까운 인척을 관리로 등용하는 등 배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궁인 이씨에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나자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명성황후는 타고난 정치적 재능을 발휘해 고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입지는 강화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20세가 되자 친정(親政)을 권하여 고종이 정치적 입지를 찾아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개방정책을 주도하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안으로는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부패한 양반사회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커져 가고 있었다. 밖으로는 서양세력이 개방을 요구하며 접근해오던 위기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심혈을 기울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대외정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허약한 경제사정과 정치상황을 고려할 때 개방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전국에 척화비(斥和碑)

▲흥선 대원군

 를 세우고 개방을 철저히 봉쇄하는 쇄국정책을 펼쳐나갔다. (척화비 : 양이침범 비전칙화 주화매국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그러나 황후는 실학파를 가까이 하고 있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  황후는 개방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 간파하고 고종에게 개방정책을 건의하게 된다. 한편 고종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아버지의 경직된 국정 운영에 이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교적 효와 윤리측면에서 보면 평생을 바쳐 자신을 황제에 오르도록 노력한 아버지와 직접 충돌하기에는 도덕적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대원군 처지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천륜에도 유교적 충(忠)의 윤리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원군은 화살을 황후에게 돌려 우회적으로 고종의 독자 노선을 견제하려 했다. 반대로 고종의 욕구를 대신해 대원군과 충돌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즉 흥선대원군과의 대리전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고종의 정치적 방패'라는 황후의 역할은 황후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마리를 던져 준다. 그 수수께끼란 왜 황후는 각종 변혁 운동이 있을 때마다 왕을 제치고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황후를 시해하고자 했던 세력들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보수파 군인과 유생,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당에서도 황후가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황후의 개방정책은 곧 조선의 개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유교적 충의 관점에서 볼 때 고종에게 직접 대항하기보다는 황후를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수파나 급진 개혁파가 황후를 공격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새 기구를 창설하면서 주요 요직을 민씨 일족이 독차지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백 60여 명에 이런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고종과 황후가 능력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친족을 가려 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정적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종과 황후가 개방정책을 추진하려면 믿을 만한 왕당파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발탁된 황후 친족들은 왕을 압도하면서 세도 정치를 일삼은 기존 외척 세력과 달리 왕권을 보좌하는 정치적 지지 기반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은 여러 차례 정치적 변란을 겪으면서 황후에 대한 의존도는 날로 높아져 갔다. 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일급 참모'라는 위치를 확고히 다져 갔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 황후의 혜안과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의 일급 참모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행록(行錄)을 보면 고종이 황후를 평하기를 " 황후는 독서량 많고, 지혜가 출중했으며, 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권력 이양을 받는데 일조를 하는 등 고종을 찬조했다" 라고 기술하여 정치적 최고의 조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 (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고, 영국의 여행가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당시 황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명성황후의 비녀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외교관으로서의 황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황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오랜 망명생활을 했던 서재필이 광복 뒤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다. 민황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다.”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훗날 황후가 시해된 후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당시 일본으로써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중략)” 라고 기록했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의 시사 만평. 조선의 지도를 반씩 밟고서 유럽 챔피언 러시아와 왜소한 일본이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있는데 미,영,프,독일의 관중이 흥미롭게 지켜 보고 있고, 세력다툼에서 패배한 청나라도 천막 너머에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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