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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치졸한 사건 은폐 작태

을미사변은 분명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최대 장애로 여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사건을 치졸하게 은폐하기 위하여 당시 그들이 작당했던 술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명성황후 시체를 불태워 없애 버림으로써 사건의 근원 자체를 없애버고자 했다.

2. 명성황후와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대원군에게 사건 전말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시도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경. 일본군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에 침입한다. 대원군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끌어내 가마에 태워 대원군을 궁궐로 호위해 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웨베르보고서의 뮤텔 주교 증언서에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옥호루에서 시해한 새벽 6시를 전후한 시각 경복궁 강녕전에 대원군을 강제로 호위해 와서 시해사건을 대원군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려고 획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당시 노스차이나 헤럴드지(紙)도 일제의 이러한 의도를 보도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과 무관함을 보도했다.

3. 공사관에 대기하고 있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6시경)했다. 그는 시해 결과를 확인한 뒤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도록 고종을 겁박하고 있었다. 그는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서명하지 아니한 폐서인(廢庶人) ‘조칙’도 내리게 하였다. 이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로 둔갑시킨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위장된 공문을 외부에 보냈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조선정부가 부정하는 내용의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4. 알렌(H.N.Allen. 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그는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관에 쫓아가 웨베르와 동행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면서 칼을 찬 어지러운 복장의 일인들이 광화문을 빠져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 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 참지 못해 고종이 머물던 방에 들어가자 거기에 미우라가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있던 고종이 알렌·웨베르에게 궁궐에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다. 미우라는 고종을 위로하고 나온 이들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꾸며댔다.

5. 웨베르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와 일제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미우라는 일제와 무관한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뺌을 했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그러자 웨베르는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라고 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6.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비화되자 일제는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축소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은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하여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7. 일본 고꾸민신문(國民新聞)은 10월17일부터 이 사건을 다음과 보도하고 일본국민들을 호도했다. “황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 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8일 새벽 2시40분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을 떠났다. 그를 호위하던 훈련대 1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서대문이 아닌 신궁의 정문 광화문에 도착했다. 대원군 일행은 시위대와 궁내부 앞에 배치된 20명의 무리에게서 소총사격을 받았다. 호위병들은 총을 쏜 뒤 곧 도망쳤지만 궁내부 앞에 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대원군에게 덤벼들다가 사살됐다. 그는 황후가 임명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이었다.”, “궁녀들과 황후의 거처에 다가오는 훈련대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궁궐에 맨 처음 나타난 외교관은 일본 전권 위원인 미우라 고로 자작, 러시아 대리공사 M. 웨베르, 그리고 합중국 공사관의 알렌 박사였다. 그들은 곧 왕을 알현했는데 그때 대원군과 함께 있던 국왕은 생기가 없었다. 국왕은 그 사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한국사람들이 이 비극에 참여했으며 그것은 귀족들의 반목이며 인민과는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급관리들이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아 나섰고 내각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8. 미국 대리 공사 알렌(H.N.Allen) 등 외국공사들이 다이(William McEntyre Dye)·사바틴· 현홍택·의녀·궁녀 등으로부터 직접들은 현장의 상황은 일본군. 영사경찰. 공사관원 등의 일본인들이 황후 시해를 자행하였고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마침내 알렌·힐리어(Hilier,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The NewYork Herald의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okerill) 등에 의해 이 사건이 각국에 알려졌다.

9. 사태가 불리해진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군민은 이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비의 ‘중세적’ 정권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호도하였다. 이어 일제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郎)를 주한변리공사(辨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

▲히로시마 재판소 전경

으로 다시 서울에 파견하는 등 비열한 3류 사무라이 전법인  2중 플레이를 하는 파렴치를 보였다.

10. 일제는 일제를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한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하여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였다. 그러나 히로시마재판부는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들을 全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들이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는 모든 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하여 깡패집단과 같이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등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다. 또한 정신 나간 메이지 일왕은 이들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치하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1.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국제여론은 잠시뿐이었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미니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전말은 밝히지 않고 덮여 버렸다. 미.영국 등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 자제를 지시하였다. 다만 상해의 The North China Herald 같은 신문만이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보고를 토대로 “이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1895. 11. 21)” 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12. 일제는 1929년 명성황후 사건을 영원히 지우기 위해 건청궁 일대의 궁궐을 허물어 버리는 파렴치를 범하였다. 그리고 1939년에는 아예 이곳에다 미술관을 지었다. 해방 후 이곳에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明成皇后殉國崇慕碑)’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명성황후 조난지지비(明成皇后遭難之地碑)’로 대체되었다.

13. 일제는 1910년 한반도를 불법 강점한 이후 이 사건을 조선 내부의 '야만적이고 중세적인' 권력 다툼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역사조작'에서 언급했듯이 한반도를 강제 침탈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한 고종황제를 독살로 제거한 후 우리국민들에게 유약한 왕으로,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권력에 집착한 여인. 친족의 이익을 위해 국가적 이익을 희생한 여인. 투기와 변덕으로 얼룩진 여인.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등등의 수많은 부정적 인식들을 대내외에 유포시켜 살인 위에 또 다른 살인을 저질러 왔다. 일제는 지난 100여 년 간 명성황후를 우리에게 이런 존재로 각인시켰다.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로 인식되도록 유포하여 왔다.


◆ 관련자 증언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시해사건에 대한 히로시마재판의 공소장 :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 13명이 왕후 민씨를 살해했다" , "궁녀들이 서로 자신이 왕후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왕후 민비 나이인 44세 가량의 여자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 영사의 보고서  
"계속해서 궁녀를 붙잡아 왕비가 있는 곳과 용모의 특징을 묻던 중 '왕비의 관자놀이에는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증언을 얻어 먼저 옥호루에서 살해 했던 용모 복장이 아름다웠던 3구의 시체를 조사한바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어 궁녀를 확인하여 왕후 민비임을 확인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진술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로는 맨 살이다....위를 행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 보니 자그마하고 마른 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으며, 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었다...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일본왕에게 올린다는 의미인 '상주(上奏)'라는 글씨가 뚜렸한 1895년 12월21일 작성된 우치다 보고서. 이는 일본왕에게까지 보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대 이태진교수가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발견했다.

영국 영사관 힐리어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프랑스‘르 땅’誌 기자 빌따알 드 라게리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 번째 경내의 이중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조 선 탐 험 대
러시아 정부는 1885∼96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군인 등 다섯 명을 중심으로 “조선탐험대”를 구성해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이 정부에 제출한 기록들은 1958년 모스크바 동방문학 출판사에서 러시아인들의 동방순례 시리즈로 출간됨으로써 공개됐다. “내가 본 조선, 조선인”(카르네프 외 4인 지음.A.이르계바예브-김정화 옮김)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책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복을 입고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황비가 궁녀들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인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일본인들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지만 그들은 단번에 칼로 그의 손을 베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가련한 황비는 더 이상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일본인들이 뒤쫓아가 그녀를 잡아 바닥에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을 다리로 세 번 짓누른 뒤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마 후 살해된 황비를 가까운 숲으로 데려가서 등유를 끼얹은 뒤 불에 태웠다."  이들은 "결단성 있고 현명한 황비가 좋게 보였을 리 없었을 것"이라며 일본인들의 행위는 "파렴치하고 역사상 유례 없는 사건"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국토 국권을 침해하고 동양평화를 유린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직접적인 배후라 할 수 있는 일본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를 1909.10.26일 하얼빈역에서 처단하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를 처단한 이유를 최후진술 첫째 항에서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일본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였다지만, 당시 조선 민중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한 과정을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토오가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에 명분상의 책임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토오히로부미 처단 이유에 대한 안중근의사 최후진술 15개항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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