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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英臟) 보고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중략…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로 시작되는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었다. 이 보고서에 의거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하여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으나,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작가 김진명씨가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냈다. 이 문서의 전문을 살펴보면 근대 일본의 기초를 형성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못해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한다.

에조는 누구인가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사진)는 일제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조선정부의 내부(요즘 내무부)고문관이었다고 한다. 조선정부 내부 고문 직책이란,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입궐한 정식 직책이 아니라 당시 일제가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일본인들이 명목상 가지는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 (角田房子)여사도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성공한 일제는 1895년 10월 8일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에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전문 한 장을 보냈다. 그것은 일본 정부에 명성황후 시해 성공을 알린 공식적인 라인을 통한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낸 관계로 전직 상사인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장문의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일본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헌정사편찬회문서 (憲政史編纂會文書)>"에 보관 중으로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에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 분량이다.

에조보고서는 역사조작.역사모르쇠 지향주의 일본의 정식보고서와 달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 김진명씨는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이 다른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의 발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던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1905∼1977)다. 그는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발간하면서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 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라고 기술하여 최초로 명성황후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이 바로 그 후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또한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서도 잠시 등장한다. 이 대목도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이후로 보인다.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
에조보고서에는 “황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황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황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 김진명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일부 증언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조작하여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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